원전 인근 주민들은 어느 지역이든 원전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정부와 한수원의 경제적 지원 및 배려 약속과 달리 오히려 다른 지역에 비해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소외되고 있다

원전 수거물 관리센터 부지 확보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17년을 끌며 대통령이 4명이나 바뀌었어도 해결되지 못한 이 문제는 참여정부 들어서도 여전히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전북 부안의 유치신청으로 큰 고비를 넘는 것처럼 보였지만, 군수의 일방적 유치신청과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 학생들의 등교 거부와 군수 폭행사건으로 이어지며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1971년11월 경남 고리에 원전 1호기 건설이 시작된 이후 32년.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의 역사는 이제 한 세대를 넘어섰다. 전남 영광, 경남 고리, 경북 월성, 경북 울진 등 전국 4개 지역이 원전을 안고 있으며 현재 가동 중인 원전만 18기에 달한다. 원자력은 우리나라 전력 생산의 거의 40%를 담당하는 제1의 전력 생산원이다.

그렇다면 원자력은 국민들로부터 그런 지위에 걸맞는 신뢰과 사랑을 받고 있는가. 원전 수거물 처리를 둘러싼 최근의 사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가. 우리나라 원자력 정책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현실적 해법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얻고자 전국 4개 원전 인근 지역을 직접 방문해 현장조사를 벌였다.



원전이 남긴 폐허-전남 영광



전남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에 있는 영광 원전은 '영광 법성포 굴비'의 산지 법성포에서 자동차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8월28일 오전. 법성포는 한가했다. 굴비 두름을 줄줄이 엮어 문 밖에 걸어놓고 손님을 끄는 가게들을 오른쪽으로 끼고, 왼쪽으로는 썰물에 바닥을 드러낸 법성항을 바라보면서 차는 북쪽으로 달렸다. 법성항 일대를 벗어나서부터 주변은 농촌 풍광으로 바뀐다. 나지막한 산과 언덕 사이에 논과 밭이 있고, 주택들이 드문드문 모여있다. 홍농초등학교를 지나 낮은 언덕을 넘어서 나타나는 마을이 원전을 가진 홍농읍 성산리다.

언덕을 지나 1~2분쯤 달렸을까. 정면 방향 멀리 주택들 뒤쪽으로 회색의 원자로 돔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조용하게 가라앉은 농촌 마을 뒤쪽으로 늘어서 있는 6개의 돔은 무거워 보인다. 원자력이니 방사능이니 하는 단어들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녹색의 농촌과 차가운 회색의 원자로는 어딘지 이물감을 느끼게 한다.

원전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주택과 상가는 피폐해졌다. 원전 정문 앞. 차에서 내려 둘러본 마을은 폐허와 다름없었다. 200가구 정도가 근처에 살고 있으나 상당수의 주택과 상가는 허물어져 황폐한 느낌을 주었다. 상가 가게의 절반 이상이 이미 영업을 포기, 가게를 비우고 떠나버려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

이런 마을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주민들은 생계유지가 가능할까.

"이게 사람 사는 동네입니까" 성산리 주민 황운조 씨는 잘라 말했다.

"6기의 원전이 가동중인 성산리가 다른 지역 보다 잘 살지는 못해도 최소한 비슷하게라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원전이나 원전 수거물이 들어오면 잘 살게 된다는 말 전부 거짓말입니다" 황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총 6기의 원전이 가동 중인 이 지역은 우리나라 최대의 원자력 단지다. 1981년12월 1·2호기가 착공되어 지난해 하반기 5·6호기가 상업운전을 시작하기까지 20여 년 동안 원전은 성산리 주민들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80년대 이전까지 성산리는 전형적인 반농반어촌이었다. 그러나 원전 공사가 시작된 이후 이 지역은 원전 지역 특유의 이른바 '원전 붐타운(boom-town)'이 되었다.

다른 원전 인근 마을과 마찬가지로 성산리도 원전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수년간은 반짝 경기를 누렸다. 공사진행과 함께 사람이 들어오고 돈이 들어와 재미를 본 사람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 사람과 돈이 썰물같이 빠져나가면 마을은 또다시 썰렁하게 공동화 됐다. 6기의 원전이 2개씩 세 차례 건설되면서 원전 특수도 세 차례를 누렸지만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세 차례의 특수에 재미 못보고 뒤쳐진 사람들입니다. 떠날 사람은 다 떠났죠. 더 이상 원전 건설도 없으니 자포자기 상태입니다. 7월 이전까지 영광이 원전 수거물 센터 후보지로 한참 거론될 때 성산리에는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원전 수거물이 좋아서 유치를 찬성한 줄 아십니까. 원전 수거물 센터가 건설되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쉬워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영광 원전에는 발전소 정문 바로 앞까지 상점·식당·주택 등 민간시설이 들어서 있다. 6호기 원자로 돔에서 가장 가까운 상점까지는 직선거리로 불과 600여m. 원전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까지 민간시설이 들어와도 되는 것인가. 비상사태가 생기면 순식간에 큰 피해를 입을 원전 코앞에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안전에는 문제가 없는가.

원자력발전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기준에 따르면 영광 5·6호기 원자로와 외부 시설의 안전거리는 6호기로부터 정문까지의 거리인 560m다. 이 안전거리는 원자력 공학적으로 다양한 조건들을 고려해 산출한 것으로, 발전소마다 원자로의 유형이나 주변 지형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이 거리는 원자로 냉각재가 원자로 밖 2차 계통으로 누출되어 방사능이 새어나왔을 경우 2시간 동안 전신에 피폭되는 방사능의 양이 25렘(rem) 이하인 거리다. 의학적으로 25렘 이상의 방사능에 피폭되면 인체에 일시적인 백혈구 감소 현상이 일어난다. 일반인들의 연간 방사선 피폭 한계가 1렘, 원자력 종사자의 한계가 20렘인 것을 감안하면 25렘은 적지 않은 양이다. 의학계에서는 5렘 이상의 방사선에 노출된 임산부는 유산이나 기형아 출산이 우려된다고 보고 있다.

성산리 입구 언덕에 있는 한수원 직원 사택을 찾았다. 사택 진입로는 양쪽에 가로수가 잘 조성된 깨끗한 아스팔트 길이다. 사택은 20여 동의 직원용 아파트 단지다. 대도시의 고급 아파트 단지만은 못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잔디밭과 수영장, 골프연습장, 테니스장, 운동장 등이 갖춰진 깔끔한 생활 공간이다. 원전 정문 앞의 폐허와 대조가 된다.

"성산리 주민들은 아직도 상수도가 공급되지 않아 지하수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한수원 직원들은 전북 고창 운곡 저수지에서 끌어온 물을 사택 식수로 사용합니다. 사택에 있는 골프연습장·수영장 같은 시설도 한수원이 직원전용으로 사용하다가 주민들의 요구로 최근에야 주민들에게 개방키로 했습니다." 주민 황씨가 목소리를 높인다.

주인이 떠난 지 몇 달, 몇 년이나 지난 듯 을씨년스럽게 폐허로 허물어지는 상가들. 담벼락이 무너지고, 깨진 유리창을 판자로 기운 주택들. 그 뒤에 무심히 우뚝 서 있는 6기의 원자로들과 도시 중산층의 생활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깔끔한 사택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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