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 철학박사,

 나의 평생의 철학적 과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였다. 그런데 어느새 “어떻게 죽을 것인가?” 로 바뀌고 말았다.

죽음을 앞둔 노경에 슬쩍 들어선 증거다. 죽음에는 세 가지 아는 것(삼가지)과 세 가지 모르는 것(삼불가지)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혼자 죽는다는 것과 빈손으로 간다는 것 등은 전자에 속하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느냐는 것은 후자에 속한다.


 


그렇지만 다만 한 가지 그가 지닌 인격이 있으니 그건 “어떻게?” 다. 충무공이 기어코 거북선위에서 싸우다 죽으리라는 무인정신에서 초지를 관철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나의 의무를 다 했노라”는 심정으로 땅에 묻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광의 생애는 후진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사와 평행선을 긋는, 그래서 과시 파란만장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20세에 해방을 맞는 청년 후광은 무었을 생각했을까 ?


 


공자의 30세 이립이라더니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6년 후 군사정권이 총칼을 들고 야밤중에 헌정질서를 뒤집어 엎는다.


 


내각수반 송씨의 개인적 인격 그러니까 정치가적 용기를 상실한 인격이 크게 작용하거니와 소장 군인 혁명가들에겐 이것이 행운으로 작용했다고 하는 5.16, 그날의 정오 방송을 나는 똑똑히 들었다.


 


사람들의 공업(功業)엔 능력과 노력에다 반드시 ‘운’ 이라는 것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1963년 김대중과 박정희의 최초 대결을 나는 동국대학교와 인접한 장충단의 인산인해속에 끼어 목격했다. 선거결과 90만표의 근소한 차로 패했다고 하지만 이건 당랑(사마귀)이 달리는 화차에 덤비는 꼴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군인들의 제거대상으로 치부됨으로써 파란만장한 정치사가 펼쳐진다.


1980년 5․18의 비극속에서 내란음모죄 군사재판을 받게 되는데 꽁꽁 묶인 피고는 재판장의 최후 선고에 신경을 곧두 세웠다.


 


‘무기’면 두 입술이 다물어 지고 ‘사형’이면 두 입술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요즘 알려진 일이지만 미국대사의 청와대 방문 덕분에 ‘사’가 ‘무’ 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으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노도광란과 싸우는 일엽편주는 소강상태를 맞게 된다.


후광의 목포상고 동기동창인 나종일(서울대 사학과 교수)씨의 정년퇴임 축하장에서 나는 전남대학교 옛 동료의 자격으로 참석했는데 서울대 교수회관은 영남출신 교수들로 만원사례의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해 가을에 대통령 선거 출마 예정인 후광이 예상 밖의 일로 참석하리라 생각도 못했었다.


나 교수의 최종 인사 전, 그의 축사는 영남출신들에게도 흥미 100%를 선사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와 처음 의례적 악수를 나눈다. 그는 아주 적절한 말을 골라가며 구수하게 축사를 이어 가 장내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고요를 찾아갔다.


 


나로선 두 번째로 접하는 그의 말소리다. 그는 “나는 역사공부가 취미였는데 나 교수가 그것을 대신해주었고, 한국으로 가서 영국사까지 하는데는 부러움을 느꼈었다”라며 “지금 내가 선망하던 대학교수 생활을 마치고 정년기념 축하파티까지 열고 있는데 나는 지금도 떠돌이 신세요 갈수록 태산 준령” 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 교수는 가장 가까운데 있는 젊은 날의 질투의 대상 이었습니다”라며 “그런데 나는 기나긴 감방 생활에서 토인비의 ‘역사연구’ 열두권을 열독 했는데 거기서 토인비는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세계군주는 진나라 시황제로서 그가 창시한 중국 최초의 사군제 정착을 비롯해서 그 짧은 동안에 이룩한 치적을 덮을 만한 황제는 전무후무하다고 했습니다”에 이르러, “중형 복역의 나는 감방 대목인 것도 내가 무기징역을 사는 죄수중의 죄수인 것 조차 잊었고 또 잊게 했습니다”로 끝나자 박수소리가 만장을 뒤덮었다. 이로서 후광은 좋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이처럼 김대중은 학구열에 불타는 정치가였다.


 


역대 대통령들이 활자 앞에서는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키고, 책이라곤 손에 들어 본적이 없었다는데 견주면 무식을 넘어서서 슬기롭고 용감하고 그래서 ‘행동하는 양심’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전남대학에서 나와 사제지간이요 광주를 대표한 민주투사였던 명노근 교수는 나에게 속삭인 적이 있다.


 


후광이 망명길에서 귀국하고, 이윽고 광주시민환영대회를 참석하게 될 때 “경비는 얼마 쯤 들겠소” “3천만 원이면 될 것 같습니다” 고 했단다. 그 뒤에 이 금액에 대해서는 일체 묻는 일조차 없더라는 것이다.


그 뒤에도 또 한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 “애 썻다”는 말뿐이었다고 했고 그래서 그는 “이 양반 과연 거물”이라고 생각했다는 조용한 이야기 였기로 젊은 나도 그때 ‘과연’이라고 찬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니까 1924년의 어느 날 밤 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가게 방에서 아버지와 자고 있는데 흔들어 깨어보니 심야 두시 경이었다. “아버지 왜”라고 했고 아버지는 “내가 이로부터 하는 말 잘 듣고 언제까지라도 누구에게 말을 전하는 날이면 우리 집은 망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멸문지화라는 말을 알고 있느냐면서 ‘갑신정변’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주셨다.


 


이 꼬마는 그때 이미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의 이름을 외웠고, 배재고보 4학년 때의 어느날 해남출신 우등생 김해선과 다른 애들이 없는 운동장 끝머리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가 땅위에 ‘이승만’을 한자로 쓰기가 바쁘게 지우면서 “너 이분 이름을 아느냐”했고 나는 “전연”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도 멸문지화가 무서워 1884년의 정변을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아버지와 친구의 이야기는 나에게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정치교육’이었다.


 


해방과 동시에 나는 대학 훈장으로 자리를 굳히기로 작정하였지만 민주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아니 가장 중요한 투표권행사로서 시민으로서의 정치의식과 정치적 의무를 다하도록 물방울 하나 정도의 ‘행동하는 양심’을 발휘해 온 셈인즉 ‘비밀투표’라는 선거제도는 얼마나 좋은 것인가! 이를 위해 민주주의는 얼마나 피를 흘렸는가! ‘죽지 않고 사라져간’ 저간의 민주투사 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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