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어르신이 동네 한 가운데에 있던 자신의 뽕밭을 아주 저렴하게, 그것도 벌어서 갚으라고 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이씨에게 제공한 것이다. 여기에 동네 사람들의 ‘울력’이 보태졌는데, 그들은 뽕나무를 베어내고 모래를 파낸 다음, 두꺼운 새끼줄로 칭칭 감은 집채만 한 바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바닥을 다졌다. 삥 둘러선 어른들이 새끼줄을 잡아당겼다 놓았다 할 때마다, 작은 가슴이 마구 쿵쿵거렸음을 태민은 기억하고 있다. 지축을 흔드는 듯한 소리가 상서롭게 느껴졌었다. 승리를 알리는 승전고의 북소리처럼, 작디작은 가슴을 때렸었다. 그렇게 해서 다져진 터 위에, 목수와 토수가 달려들어 방 두 개와 창고가 딸린 열일곱 평짜리 초가집을 지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김씨는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방 한쪽의 사과 궤짝 위에 연필 한 타스, 공책 다섯 권을 놓고 시작한 장사. 사탕 한 봉지, 과자 두 봉지가 놓이다가 점점 궤짝 수가 늘어났다. 물론 처음에는 이씨의 반대가 극심했다. 해먹을 짓이 없어 아이들 코 묻은 돈을 빼앗느냐고. 하지만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이 모아져 목돈이 만들어지고 창고가 가게로 개조되어 틀이 잡혀가는 광경 앞에서 이씨 역시 암묵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 나라에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고,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선전했다. 정부에서는 여세를 몰아 한일협정 조인을 밀어붙였고, 맹호부대가 월남에 파송되어 ‘따이한’의 용맹성을 뽐내고 있었다.

명색이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씨의 조언도 있긴 했으나, 나름대로 지혜가 있다 자부하는 김씨는 ‘이익을 적게 보되 물건을 많이 파는’ 이른바 박리다매 작전으로 나갔다. ‘물건 사는 사람한테도 이익을 주고, 물건을 파는 사람도 이익을 봐야 한다’는 선구적인 상인정신이 성공을 거두어 남촌, 송정, 염전 등 인근 동네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다. 취급 품목 역시 일상용품에서부터 삽과 호미, 비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졌고, 급기야는 나락장사, 새우젓장사까지 겸하게 되었다. 특히 젓 장사를 위해 지하 저장고가 만들어졌다. 바닥과 벽이 시멘트로 발라진 그 곳이 칠산 바다에서 밤새워 잡아 올리어진 새우들로 차곡차곡 포개졌다. 소금을 뿌린 다음 새우를 넣고, 다시 소금을 뿌린 후에 새우를 채우고 하는 식으로 작업은 이루어졌다. 그리고 푹 익은 젓은 백산장이나 영광장에 비싼 값으로 팔려나갔다.

부가가치의 극대화라고 해야 할까. 그날 벌어 그날 쓰고, 염판 작업에서 뻘땅을 판만큼 일당을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해하던 시절,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막고 품는 식’으로 살아가던 시절에 이씨는 특유의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업으로 일구어진 가정 경제는 논밭을 사들임으로써 농업분야로까지 확대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동네에서도 손꼽히는 대농이 되었다.

이제 어린 시절의 가난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철들 무렵부터 돈에 구애를 받지 않았던 태민은 ‘풍요’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잡부금 내라면 그 이튿날 갖다 내고, 책이나 옷은 반드시 새 것 차지였으니. 다른 집 아이들이 병이나 헌 고무신을 들고 가게를 찾을 때, 태민은 손만 뻗으면 과자나 사탕을 맘껏 먹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씨의 큰소리.

“모름지기 사람은 그래서, 배우란 소리여어. 머릿속에 든 것이 있으먼, 은젠가는 풀어 먹그든. 나 봐라. 느그 한아씨한테 모래땅 쪼까 받었제마는 연탄공장 망허고 난 게, 폴세 떡시리 엎어먹었다고 사람들이 그랬제 어쨌디야. 그러제마는 인자 살림 일어나는 것 조까 봐라 요. 다 사람한테 매였어야. 그런게 느그덜한테 차코 공부 허라고 허제 어찐디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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