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진/ 사회복지학박사 ,영광신문 편집위원

 누구나 오월이면 숙연해지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기인 것 같다. 필자가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월삭새벽기도회를 갖고 있는데 주제가 "아버지"이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몇 해 전에 보았던 그림 한 점과 책 한권을 통해서 이 시대의 아버지 모습을 나눠보고 싶다. 집을 나가는 아들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말리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아들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무작정 기다리며 애태우는 아버지, 눈물로 나날을 견디며 고통에 찬 삶을 사신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사죄할 틈도 주지 않고 용서하고 말았다.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한 나머지 가장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이 아버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탕자들을 아무 말 없이 껴안는 예수 그리스도와 다름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는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 헨리 나우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 그림은 그 사람의 삶을 바꾸었다. 나우웬은 평생 "탕자의 귀향"과 함께 살았고 "탕자의 귀향"을 썼다. 나우웬이 하버드의 교수직을 버리고 죽는 날까지 '라르쉬 공동체'에 들어가서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 살기로 결단하게 된 배경에 이 그림이 있었다.

 "탕자의 귀향"은 렘브란트가 나이 먹어 그린 대작으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아버지의 유산을 들고 자유를 찾아 떠난 작은 아들의 생활은 방탕하였다. 먼 나라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허비해 버리고 급기야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다. 돼지 먹이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 하지만 그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굶주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자기가 떠나 온 아버지 집에서 지내던 풍성한 시절이 생각났다.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들도 풍족하게 먹지 않았던가. 이렇게 죽느니 아버지 집에서 품꾼이 되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안고 입 맞추며 잔치를 벌였다.

 큰 화폭의 이 그림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 노인이 거렁뱅이 같은 사내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거의 눈이 먼 아버지는 말없이 안아 주고 있다. 아들은 남루한 옷차림에 겉옷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같은 모습이다. 그의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깎여져 있고, 다 닳은 샌들이 벗겨져 드러난 발바닥은 부르트고 굳은살이 박혀 있다. 온갖 풍상을 겪다 돌아온 작은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손에 한없이 따사로운 빛이 비추고 있다.

 왼편에는 껴안고 있는 두 사람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인물이 서 있다. 이 집의 맏아들이다. 그리고 중간에 앉아서 가슴에 손을 얹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포옹을 지켜보고 있는 인물과 하녀인 듯한 여자가 보인다.

 헨리 나우웬은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이 작품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숨이 막혀 온종일 이 그림을 떠날 수 없었다.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해석했다. 카톨릭 사제이며 심리학자인 나우웬이 대학교수의 일을 접고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것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두 팔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구경꾼에서 주인공이 되는 일이었고, 회개를 가르치는 자리가 아닌 회개하는 죄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었으며, 소중한 존재로 사랑받는 인간이 되는 과정이었다. 아버지의 품, 그곳은 "그토록 들어가기 원하면서도 두려워서 차마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자리"였다.

 "그토록 간절히 열망하고, 소원하고, 갈구하던 것들을 모두 받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악착같이 붙들고 싶은 모든 것들을 놓아 버려야 하는 자리였다."

 이야기 속 아버지는 차라리 어머니의 성정을 지녔다. 자세히 보면 아들의 어깨에 얹은 아버지의 오른손은 여성의 손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흡사 자궁 속 태아의 모습이다. "탕자의 귀향"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기하는, 즉 '존재의 근원'으로 회기하는 이야기다. "탕자의 귀향"에서 대다수 감상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무릎 꿇은 아들에게 투사한다. 또한 자신이 큰아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결국 그림은 감상자를 아버지의 자리로 밀어 넣는다. 나우웬은 "아버지는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고, 내 여정의 종착점이며, 마지막 안식처"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림 속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향해 우리의 두 손을 펼쳐 용서와 사랑과 치유의 초청을 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되기까지 우리의 영적 귀향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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