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民主)에서 민치(民治)로’
홍성이/ 정치학 박사
한국 민주주의는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괄목할만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라는 6월 항쟁 당시의 요구가 제도적으로 실현됐고, 이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졌습니다. 두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진행되면 민주주의 공고화의 테스트를 통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1997년 정권교체와 2007년 정권교체로 이미 공고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도적 측면에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6월 항쟁 이후 지난 23년간의 한국 민주주의의 내용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분출되는 환경은 마련되었지만, 이러한 의견들이 민주적 방식으로 논의되거나 상호 수렴되는데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정치세력간에도 건강한 정책경쟁이 유도되지 못하고 포퓰리즘이 동원된 이념대립으로 치닫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더구나 국제적인 탈냉전이후에도 남북관계가 국내정치화되는 경향을 띠면서 한국정치와 민주주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 및 사회세력간 매도와 독선, 배제와 제압의 분열상이 심화된 것은 민주사회의 다차원적 의사 경쟁의 수준을 벗어난 것입니다.
한국 민주주의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전투적인 구호로 시작하여 제도개선 수준에서 머물러 있었던 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선언적 ‘민주’는 난무했지만, 자신의 집단과 조직, 개개인의 삶에서 민주주의 문화가 피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주창한 민주투사가 자신이 속한 단체와 자신의 삶에서는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이런 연유입니다. 그러다 보니 민주주의는 권력투쟁을 위한 선동 수단쯤으로 치부된 경향이 컸습니다.
이제 한국 민주주의는 국민 다수에게 좋은 삶을 제공하는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또 국민 개개인은 민주주의를 통해 좋은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후진국에서 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두 단계 거친다고 하는데, 하나가 ‘민주화’의 단계이고 다음이 ‘자유화’의 단계입니다. 민주화란 국민이 투표를 통하여 통치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자유화란 그렇게 선택된 통치자가 국민 개개인을 개성과 창의를 존엄히 여기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떠받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주화 단계는 제도만으로 가능할 수 있지만, 자유화단계는 통치자의 의지와 국민 간에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여정입니다. 다수 국민의 좋은 삶은 바로 이 자유화 단계에서 구체화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어떤 게 좋은 삶이냐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옳은 것’과 ‘좋은 삶’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는 다양한 사회집단과 개인들이 한 사회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 ‘옳고 좋은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류문명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정치투쟁과 실험이 실패를 거쳐 결국 다원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로 귀착된 것입니다.
의견이 다른 다양한 집단과 개인이 민주주의 제도에서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경쟁의 룰’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룰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룰’ 즉, 규칙이야말로 의견이 다른 다양한 집단들을 조정하고 조화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갈등과 다양성 속에서 ‘실현 가능한 일치’를 찾는 과정입니다. ‘우리’와 ‘그들’의 차이를 적대하거나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화하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 민주주의는 전투적․선언적 차원의 민주(民主)의 시대를 넘어 국민 개개인이 좋은 삶을 실현하며 다스리는 명실상부한 민치(民治)시대로 접어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