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택/ 영광군지체장애인협회장 영광문화원 부원장

 

내가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건강할 수 있을까
불확실성의 시대에
그 누가 자신있는 대답을 하랴

출근 길의 남편이 시체로 돌아오고
놀이터의 아이들이 구급차에 실려가고
건강한 청년이 휠체어에 의지하고
목발짚고 횡단을 건너는 아스막거리는
눈앞의 풍경들

어제의 정상인이 오늘 비정상인이 되고
비웃으며 쳐다보던 휄체어가 내 앞에 놓이고
마냥, 천진난만한 내 아이들
의식불명으로 사경을 해맨다.

모두가 장애를 눈 앞에 두고도
설마, 내가! 하고
무딘 혀만 차다가
언젠가는 정말. 내가! 하는
슬픔을 맞는다.

영원한 정상과 비장애를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내가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건강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지금 우리는 장애 속에서 살면서
일시적으로 장애를 잊고 살 뿐이다.

  앞의 시는 필자가 몇해전에 쓴 졸작의시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라는 시이다. 졸지에 책임이 막강한 우리군 장애인협회의 회장자리에 앉으면서 다시 한번 해가 지난 이 시를 챙겨보는 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일일것이다.

  지나간 10년의 세월은 내게 있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역경의 시기였다고본다. 2000년 7월, 그당시만 해도 50대초반의 건강하던 모습,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때까지는 유행이 들끓던 독감한번 걸리지 않고 살았었다.

  어느 학교 근무시절엔 20여명의 교직원이 나만 빼고 모두가 그때의 감기 브랜드였던 홍콩감기에 만연했었는데 이상하게도 나혼자만 피해갔던 것이다.

  주위사람들은 나에게 벼라별 별명을 다 불러준적도 있었으나 갑자기 내게 불어닥친 “中風” 이라는 바람은 이름답지 않게 내 온몸을 마비로 만들었으니 바람치고는 무서운 위력의 바람이 아니었겠는가

  그로부터 나에게는 내몸을 내가 자유롭게 부릴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휄체어타고, 목발짚고 이름도 알수없는 장애보장구들에 의해서 생활을 하게되었으니 이름하여 장애인이란 찬란한 이름을 하나 더 얻게 되었으니 박수를 쳐야할 일인가 눈물을 흘려야할 일인가 그 무렵 내심정을 담았던 시가 바로 이 시였기에 오늘다시 꺼내서 읽어보는것이다.

  그로부터10년, 나는 교단에서 40년가깝게 생활을 했으나 책임자의 직책에는 가까이도 못했다. 그런데 장애를 달고 장애협사무실을 드나들며 장애인들 위한 검정고시반 강사, 한글미해득자 한글가르치기 교육강사등을 하다보니 협회에서 같이 하는 시간도 많아져서 지금이렇게 3~4천명이넘는 장애인을 위한 회장이라는 직책의 자리에 앉고 말았다.

  퍽이나 어려운 자리 그래서 자꾸자꾸 책임자가 바뀌고, 떠나고 하다보니 협회의 이미지가 실추되어가고 신뢰는 없어져가는 터에 짧은기간이 되겠지남 공석인 협회의 장 자리에 앉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할일은 우리협회의 신뢰와 화합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데 힘을 써야할 것같다. 서로의아픔, 누구에게도 얘기 못할 우리들의 슬픔을 우리가 서로 부둥켜 안지않으면 그 누가 우리들을 안아주겠는가 사업도 중요하지만 가슴따뜻한 협회분위기를 만들어 작고 큰 불편이나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야말로 화합의 장이 되도록해야겠다. 그러면서 밖으로는 낡고 비좁은 협회복지회관의 기능성확보에 노력을 해볼일이다. 이용회원수는 10년전에 비해서 배로늘어났는데 공간은 좁아서 수용할수가 없는 노릇이니 이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관계부서와 협의하고 의논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볼것이다. 예을 들면 현회관을 군에 기부체납하여 개축또는 증축하는문제라든가 혹은 매각하여 제3의 지대로 옮겨 좀더 넓고 쾌적한 분위기의 회관을 만들어보고 싶은 일들은 쉬이 해결될일은 아니지만 여러회원들의 힘을 모아 추진해보고싶은 소망이다. 할 일들은 많지만 재정상의 문제에 부딪혀 다언급할수는 없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신뢰와 화합이 먼저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점진적으로 추진해 보고싶다는 것이 나의 소망이자 우리협회모두의 소망이 아닐까. 하여튼 지역사회 모든분들이 지켜보시고 함께해주시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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