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진 /광신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

사회복지학박사
영광신문 편집위원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 1669.10.4)는 황혼기에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란 그림을 그립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를 바탕으로 한 그림입니다. 러시아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에르미타즈궁 내(內) 미술관에 걸린 이 그림은 높이가 2.4미터 폭 1.8미터의 캠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려진 거대한 작품입니다. 헨리 나우웬(케톨릭 신부 하버드대학 교수)은 어느날 우연히 어느 보육원을 방문 했다가 복사판으로 된 이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로 달려가 에르미타즈궁 내(內)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 그림을 보게 됩니다. 이 그림에 영감을 얻은 헨리 나우웬 (Henri J.M. Nouwen)은 "탕자의 귀향"이란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책에서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자세히 해설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자식을 눈물로 기다리다가 눈이 짓물러 아버지의 눈은 초점이 없습니다. 시력을 상실한 노인, 이는 눈이 멀기까지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아버지의 손을 보면 힘없이 아들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은 서로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왼쪽 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남자손이고 오른쪽은 매끈한 여자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모두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 화해와 용서, 치유가 함께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작은아들의 모습을 보면 샌들이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이고 오른발은 망가진 샌들을 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삭발한 머리, 이는 죄인된 인간의 모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을 통하여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됩니다. 그는 하버드, 옥스퍼드의 교수라는 보장된 자리를 버리고 처음 이 그림을 보았던 보육원으로 가서 만났던 장애아 여덟명을 돌보며 평생을 살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이 하버드대학 교수의 직을 그만두고 섬겼던 정박아 시설인 데이브레이크(Daybreak)는 바로 헨리 나우웬의 세상을 보는 각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영화, <멋진 인생>에서 주인공 조지로 분한 제임스 스튜어트는 오스카 상을 받을 때 상은 순전히 각도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감독이 정확히 십오도 각도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라고 했기 때문에 그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십오도 각도 때문에 이 유명한 배우와 감독은 필림을 수없이 버렸습니다. 배우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버텼고 감독은 반드시 십오도로 쳐다보라고 고집했으므로. 감독이 고집한 십오도의 고개 들기란 무엇이었을까? 그 십오도는 지나온 삶을 회고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각도였을까? 한때 비행사였던 주인공의 삶이 하늘에 있었으므로 그는 하늘을 보면서 자신을 보았던 것일까. 삶을 돌아볼 때 사람들은 고개를 숙입니다. 내면을 향하는 것이죠. 기도를 하는 이들이 고개를 숙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 안의 나를 찾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보지 않습니다. 허공을 향하는 시선이 공허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저자 나우엔은 팔십도 각도를 말합니다. 팔십도라면 어떤 각도일까. 거의 직각에 가까운 그 각도는 모든 것을 환하게 드러냅니다. 팔십도는 숨길 수 없는 각도입니다. 팔십도는 모든 것을 드러내는 각도, 하늘에 있는 태양이 땅으로 쏟아지는 그 각도에 가까운 각도인 것입니다. 태양, 자연광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빛이 달라지고 은밀한 것들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혹은 구석에 숨어 있던 인물은 빛의 각도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고 표정을 드러냅니다. 빛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옮아가면서 각기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랴. 빛은 시각에 따라 다른 색채를 품습니다. 창백하거나 노랗게나 붉거나. 시각에 따른 빛의 변화에 따라 색채는 따스해지거나 차가워지거나 온화해집니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그득한 오르세 미술관은 온통 창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빛을 중시한 작품들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의 과거를 몰라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아들을 꾸짖지도 않습니다. 후회하는 자에게 꾸짖어서 무슨 소용이랴. 그는 큰아들의 마음을 몰라서 작은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생을 나무라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 아들이 편협하다고 꾸짖는 일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이 자신의 아들임만을 보는 그의 시선의 각도는 팔십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의 각도입니다. 내게는, 우리들 모두에게는 팔십도 각도가 필요합니다. 외양에 쏠리는 아들들의 각도보다 아버지의 각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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