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 여민동락 공동체 대표, 영광신문 편집위원

  세밑 풍경, 역시나 스산하다. 단골로 다니는 구멍가게 아주머니의 표정도 잔뜩 일그러져 있다. 겨울 한 철 살림에 보탤 요량으로 7년 째 가게 입구에서 붕어빵을 굽는데, 올해는 그조차 신통치 않다며 푸념이 한가득이다. 대형 쇼핑몰 전문업체 팀장이던 사십 다 된 후배는 회사가 폐업하는 바람에 일터를 잃고 직장을 구하고 있고, 전자기기 판매업을 하는 고향친구는 전화통화 목소리에서조차 박력이 없다.

  생각만 해도 명치끝이 아려온다. 늘 그랬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세밑 민중들의 몸과 맘이 쓸쓸한 탓이다. 송년회다 뭐다 소주 몇 잔 들이키며 ‘위하여’를 연발하지만, 평범하게 사는 민중들의 고단한 살림은 그닥 펴지질 않고 술자리 건배의 호기는 한 순간으로 그치는 까닭이다.

 한 해를 마감하는 여민동락공동체도 상황이 만만치 않다. 식구는 늘어가는데 잘 나가는 ‘큰 손’이 있어 뭉칫돈 기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노동과 생산 그리고 후원금으로 자립목표를 세운 마당에 어디 눈 먼 돈 없느냐고 지자체에 가서 떼 쓸 일도 아니다. 후원가족이라 해봐야 저마다 녹록치 않은 살림 쪼개서 십시일반 나누는 평민들이 전부이기에, 흔히 하는 ‘후원의 밤’도 오히려 가난하고 착한 사람들에게 부담줄까 취소했다.

  그래서일까. 연말 소득공제 기부금 영수증 발급을 위해 후원가족 한 분 한 분 이름을 확인하는 여민동락 식구들의 심정이 각별하다. 특히 생활이 어려워 잠시 나눔을 중단하고 있는 분들 명단 앞에선 지그시 눈을 감게 된다. 그들의 거친 손과 쓰린 속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내 눈길을 붙잡는 이름이 있었다. 묘량중앙초등학교 ‘작은학교 살리기’ 회원이자 내게 가장 큰 감명과 인식의 전환을 준 공무원, 바로 이현춘 전 묘량면장이다. 칼럼에 기명까지 언급하는 게 행여 누가 되지 않을까 저어되지만, 학력과 인맥은 물론 친인척 다 털어도 전혀 나와 특수관계가 아닌 만큼 오해는 없으리라.

  사실 언젠가는 한 번쯤 소개하고 싶었다. 묘량면장으로 재직 중에야 눈 앞에 모셔두고 낯간지럽게 격찬하는 것조차 결례라 생각돼 망설였지만, 지금은 다른 곳으로 발령받은지 오래라 얘기 꺼내기가 차라리 홀가분하다.

  그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게 ‘양복바지에 운동화 차림’이다. 열정은 가치있는 일에 노동과 시간을 쏟아낼 때 꽃피어나는 법, 그는 늘 이른 아침부터 한 낮 뙤약볕 그리고 해름참까지 묘량면 곳곳을 누비는 촌장이자 머슴이었다. 운동화 차림으로 면사무소 직원들과 동행하며 마을 곳곳에 철쭉을 직접 심고 묘량면 땅 44.76㎢를 시종일관 종횡무진 걸어다니며 주민을 만나 대화하고 설득하고 감동주면서 임기 끝까지 고군분투했다. 면장실에서 간혹 면담을 할 때면 넘치는 상상력과 투혼과 열정으로 면정을 소개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리더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무원하면 그닥 매력도 호감도 없던 내게 그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시골 면사무소야 무슨 애간장 녹이는 민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면민 숫자라 해봐야 고작 이천 명도 안 되는데, 연상되는 건 장사 안 돼 파리 날리는 국밥집 풍경이요 꾸벅꾸벅 의자 제끼고 졸고 있는 간부공무원들 모습이 내 편견의 전부였던 터다. 얼핏 들어 아는 얘기지만, 그는 학력 좋고 고시 합격한 엘리트 공무원이 아니다. 그는 몸으로 말하는 현장형이다.

  그래서다. 여전히 철학도 다르고 마을살리기 궁리도 차이가 크지만, 나는 그래서 그를 좋아하고 그에게서 공무원의 미래상을 확인한다. 그는 머리로 각색하지 않고 손발로 증명하는 그야말로 ‘일꾼’이다. 주민은 온데간데 없고 이리저리 단체장 선거에 줄서서 정실인사에 기대 출세길 찾는 공무원도 부지기수고, 가난한 동네 시골면장 자리 면사무소 면장실이야 승진시험 준비하는 도서관쯤으로 생각하는 관행도 여전하다지만, 그는 출퇴근 시간 없이 몸으로 성실하고 마음으로 지극했으니 나는 그에게서 희망을 봤다.

  공무원들 입장에서야 스스로 일 벌리고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 떠는 상관 좋아하는 아랫사람 어디 있겠냐만, 주민들 입장에선 마을과 거리에서 수시로 만나는 공직자, 그런 시골면장이 최고다. ‘목민심서’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다산, 그는 공직자에게 “머물렀던 자리에 향기를 남기지는 못할망정 구린내를 남겨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이현춘, 그가 떠난 묘량면에는 철쭉향이 가득하다. 내년 봄 철쭉 만개하면, 생각이 있는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면장시절을 회상하게 될 것이다.

  다른 곳으로 부임해 가신 뒤로 연락이 끊겼다. 연초에는 꼭 운동화 한 켤레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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