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영광신문 편집위원

 “오매-단풍들것네” 뒤란 장독대 위로 떨어지는 한 잎 낙엽을 보는 순간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 가을을 느끼며 절절로 터저 나온 누이의 탄성! 그런 누이의 놀람은 곧 시인의 마음이기에 제목 또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이다. 그렇게 찾아온 가을도 잠시, 어느덧 툰드라의 매서운 계절풍과 함께 추위를 몰아 온 우리들의 지난(2010년12월부터 2011년 현재까지)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고 매서웠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져 가는 구제역과 조류 독감 등으로 인해 더욱 힘들었다. 지난 번 내린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이틀이 멀다 하고 다시 내려서 쌓이는 폭설, 겨우내 지속된 폭설과 차가운 바람에 우리들은 한 잎 낙엽에서 계절의 변화를 깨닫고 “오매 단풍 들것네”라고 외마디를 내지른 누이의 반가움과는 반대로 누구나가 “이놈의 눈 이제 그만 좀 올 것이지...”라고 생각한 그런 겨울이었다.

 그러나 그 겨울이 꼭 그렇게 지겹고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실로 몇 십 년만에 찾아 온 강추위 와 장기적인 적설(積雪)은 향리의 모든 저수지를 꽁꽁 얼어붙게 하였고 온갖 아름다운 설경을 연출해 냈으며, 심지어는 바닷물까지 얼어붙게 하여 참으로 오랜만에 유빙의 모습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눈보라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유년(幼年)의 겨울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동내 조무래기들이 모두 모여 무릎까지 빠지는 산 속을 헤매며 산토끼를 쫒던 기억, 수정처럼 맑은 얼음판 위에서 아직 어린 동생을 썰매에 앉히고 밀어주었고, 학교 유리창 창틀 밑의 레일을 빼내 스케이트를 만들어 외발 스케이트를 타고 누가 더 멀리 가나? 설에 떡 내기 시합을 했는가 하면, 팽이 싸움(빙구자:氷球子), 헌 비료 포대를 깔고 앉아 눈 위를 미끄러지던 눈썰매, 설날 아침이면 새로 산 설빔을 차려입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마을 전체를 돌며 어른들께 세배하고 가는 집마다 정성스레 차려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기억, 꿀 엿에 떡을 찍어먹다 성이 안차면 엿 종지를 들고 들이 마실 때 입 안 가득히 감도는 그야말로 달콤했던 그 꿀 맛, 정월 대보름 전야에는 쥐불놀이를 하며 새로 한 살 더 먹은 나이만큼 불길을 뛰어넘었고, 눈썹이 하얗게 될까 봐 온 밤을 꼬박 새기도 했으며, 다음날 아침에는 더위 파는 재미에 일찍이 동구 밖을 해매기도 했다. 특히 겨우내 기를 쓰고 날려대던 연 날리기는 이 날을 마지막으로 애지중지하던 그 연 줄에 불을 달고 무한한 동경과 소망을 담아 띄어 보내 허공 저 멀리 한 점 티끌이 되어서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추억이다.

 시간의 영원성(永遠性)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순간(瞬間)들의 결합으로 이어지며, 그 순간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대부분 잊혀지지만 우리들의 뇌리 속에 강하게 각인된 이미지는 영원히 간직되기도 한다. 우리들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한 순간의 겨울 서정이 유능한 시인에게 포착되어 우리들의 감정에 전이(轉移) 된 명편(名篇)들도 부지기수인데 그 중 한 편을 소개한다.

 

순간에서 영원성을 포착한 겨울 수채화

 

눈보라 비껴 나는

전군가도(─全─群─假─道─)

퍼뜩 차창(車窓)으로

스쳐 가는 인정(人情)아!

외딴집 섬돌에 놓인

하나

 

세 켤레

-장 순하의 시 “고무신” 전문-

전라북도 전주에서 군산을 연결하는 길.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달리는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하나, 울타리도 없고 사립문도 없는 외딴집의 오두막 섬돌에 놓인 고무신 세 켤레를 통해 우리들의 정서를 그려낸 수채화는 눈물겹도록 정감이 넘치고 아름답다. 달리는 열차의 창문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의 문이며 고운 심성의 상징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어린 자식, 비록 외딴 집이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이 가족은 겨울 추위와 눈보라 속에 갇혀있으면서도 행복하고 따뜻하기만 하다. 그리고 차창을 스치는 그 풍경 속에서 온갖 상상력을 창조해내는 시인의 마음도 더불어 행복하다. 겨울 눈보라 속 외딴집 오두막 안의 풍경은 어떤 것일까?

 아버지는 새끼를 꼬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바느질을 하고, 어린 자식은 따끈한 군고구마를 발라 먹으며 겨울방학 숙제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달리는 차창 밖에서 순간적으로 지나쳐버리는 한 컷의 포착이지만 외딴집 섬돌에 놓인 고무신 세 켤레를 통해 시인이 그려낸 조선의 마음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미지이며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읽는 사람의 마음에까지 전이됨으로써 수 천 수 만 가지의 아름다운 겨울 수채화 같은 우리들의 정서를 대변해주고 있다.

 이제 그렇게도 지루했던 겨울의 끝에 우리는 서 있다. 낙엽 한 잎에 가을이 왔음을 알아차린 누이의 그 마음처럼 아직 녹지 않은 얼음장 위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발산하며 뽀얀 털복숭이 망울을 터뜨리는 버들강아지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이렇게 되 뇌일 것이다.

“봄은 봄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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