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하자마자 3마지기 600평 밭을 얻었다. 시골생활이라곤 전혀 해 본 적 없는 도시촌놈(?)인 민하 아빠(여민동락 노인복지센터장)는 양파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고추농사까지 하고 싶다고 했다. 제 밥상에 오를 음식을 직접 유기농으로 경작해서 자급하겠다는, 그때만 해도 제법 신명나고 낭만적인 구상이었다. 금세 후회한 일이지만, 수십 년 농사를 지어온 어르신들에게도 밭농사 600평은 그리 간단한 농사가 아니었다.

마을방역을 맡아 해뜨기 전과 해가 진 후엔 온 동네 소독작업 하러 다니랴, 낮에는 어르신들 모시고 복지활동 하랴, 밤에는 동네 아이들 공부 가르치는 야학 운영하랴, 어디 농사지을 틈이 있었겠는가. 그것도 농사를 전업으로 하는 농사꾼에게도 벅찬 밭일을 말이다. 당연히 풀 반 곡식 반 엉망이었다. 상농은 밭을 가꾸고 중농은 곡식을 가꾸고 하농은 풀을 가꾼다 했다. 알게 모르게 동네 원성이 자자했다.

타고난 농사꾼이 오죽해야 대물려 짓던 땅을 내어 놓았겠는가, 그것도 농사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그런데 그런 풀밭을 보고 있는 땅 주인 심정은 어찌했을 것인가. 그런 원성을 이유삼아 나 또한 온갖 지청구를 퍼붓곤 했다. “농사의 농(農)자도 모르면서, 도시에서 귀농 관련 책만 몽땅 머리로만 공부해서 농사를 시피보고...”라면서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그런데 어찌하랴. 그 해 가을, 나는 민하 아빠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동네 고구마 농사가 죄다 흉작이라 소출량이 전년도에 훨씬 못 미쳤다는데, 우리 밭에서만 캐도 캐도 줄줄이 고구마가 쏟아지는 게 아닌가. 어라..이게 무슨 횡재냐 싶었다. 민하 아빠는 그걸, 이른바 풀 안 뽑고 농약 안치는‘태평농법’덕분이라 했다. 운 좋은 놈은 별스럽게도 하늘이 돕는다더니 휴경지로 얻은 우리 밭이 거름이 잘 배인 옥토 중의 옥토였던 덕분일 것이다. 결국 자원봉사자들과 손으로 캐는 데만은 한계가 있어 동네 농군의 힘을 빌려 기계로 밭두럭을 뒤엎어 캘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어느 날 경로당에 갔더니 몇몇 어르신들이 칭찬하신다. “올 해 고구마 농사가 아주 잘 됐담서라우. 그렁께 뭣할라고 젊은 사람들 하는 일에 풀을 뽑네 안 뽑네, 농사를 아네 모르네, 뭐시라고 할 것이요. 다 배운 사람들인께 다 신농법을 배워와서 이라고 잘 헐 것인디.”

졸지에 우리는 토박이 농사꾼도 인정하는, 도시에서 신농법을 배워 온 농사 전문가가 된 것이다. 그 때 이후로 휴경지 600평에서 지금은 1만평 넘는 밭농사 대농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그 태평농법(?) 덕분이다.

누군가 말하길 “농사꾼이 곡식이나 푸성귀를 씨 뿌리고, 싹 트고 줄기 뻗고 꽃피고 열매 맺는 동안 제아무리 부지런히 수고해 봤자, 결코 그것들이 스스로 그렇게 돼 가는 부산함을 앞지르지 못한다”고 했다. 딱 맞는 말이다. 결국 하늘과 땅이 다 그렇게 농사의 대부분을 가르치는 선생인 셈이다.

여민동락은 7개의 마을농장을 운영한다. 일명 동락원(同樂園)이라 한다. 대단지 밭을 일구는 게 아니라, 어르신들이 내어놓은 휴경지를 군데군데 마을마다 얻어서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경작하는 식이다. 4,700여 평에 모싯잎을, 5,000여 평에 동부콩을 친환경으로 재배한다.

나머지는 여민동락 밥상에 오를 식재료를 재배하는 텃밭이다. 그야말로 좌충우돌, 농사 솜씨는 어설퍼도 식구들끼리 틈나는 대로 어울려 일궈간다. 올 해는 제법 텃밭 풍경이 그럴싸하다.

직접 밭을 갈고 일궈, 그 땅에서 나는 채소와 곡식으로 먹고 나누고 즐기고 살며, 스스로 농사를 짓고 더불어 농민이 되고, 나아가 농토를 지킨 어르신들을 모시면서 마을과 사람과 땅과 어울려 한 몸이 되고자 한 소박한 뜻, 그것이 여민동락의 첫마음이다.

그런 첫마음이 계속되다보면 언젠가 여민동락 좌충우돌 농장에도 천운이 가져온 풍년이 아니라 ‘진짜 풍년’이 들 날이 반드시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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