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근/ 언론인

선데이 서울은 옐로우 페이퍼의 효시다. 조선일보는 확인되지 않은 혼외아들로 재미를 보고 있다. 11세 아이의 인권은 눈감았다. 선데이 서울과 다를 바 없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시대가 아니다. 조선일보가 선데이 서울과 같아서는 안된다

1968년 서울신문사에서 선데이 서울이란 주간 잡지를 내놨다. 말 그대로 잡()것들을 실었다.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여성 누드 사진이나 내용이 야한 기사와 믿거나 말거나 식의 스캔들 등이 가득한 선정적인 잡지다. 요즘말로 야동을 즐기려면 친한 사람끼리 은밀한 장소에 모여야 했다. 요즘 북한이 그런다던가? 미니스커트와 장발까지 단속하던 박정희 정권이 선정적인 잡지의 출판을 허용한 속내는 무엇일까.

선데이 서울은 불티나듯 팔려 나갔고 유사한 잡지들이 뒤를 이었다. 방방곡곡에 일하자는 새마을 운동 노래를 틀어대며 국민을 다잡던 박정희 정권이 이같은 선정적 출판물(옐로 페이퍼)을 허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독재 정권의 억압으로 인한 국민의 불만은 집권 기간과 비례해 커졌다. 어딘가 불만을 배출할 통로가 필요했다. ‘선데이 서울은 정권을 향한 불만의 표출을 예방하고자 하는 정치적 도구로 이해된다.

뜬금없이 91년에 폐간된 선데이 서울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혼외 아들이 최근 국내 최대의 뉴스가 되어 있어서다. 조선일보가 현직 검찰총장에게 혼외 아들이 있다고 대서특필을 한데서 비롯됐다. 겁도 없다. 최고 권력 기관의 수장을 건드렸다. 확실한 증거 없이는 보도하지 않아야 할 기사다. 부모의 말이 일치하거나 유전자 검사 외에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확인되지 않은 선정적인 기사로 재미를 보는 것이니 옐로 페이퍼인 선데이 서울과 다를 바가 없다.

조선일보는 사회를 올바로 이끌어야 할 정론지로서 신중하지 못했다. 이제 11세인 아이가 받을 충격, 아이의 장래 따위는 무시했다. 북한 국민의 인권에는 관심이 있어도 서울에서 아무 탈 없이 살고 있는 한 아이의 인권은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다니던 학교와 살던 집을 옮기는 데서부터 시작될 아이의 고통, 정신적 충격을 안고 살아야 할 아이의 일생을 한 번이라도 생각 했는지 묻고 싶다.

세간의 관심과 의혹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혼외 아들 여부다. 다른 하나는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검찰 총장을 흔들어 낙마시키기 위한 공작인가다. 조선일보는 보도하기 전에 채 총장의 머리카락과 아이의 머리카락을 은밀하게 수집,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특종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언론의 특성상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도성은 확인할 길이 없지만 빼먹었다.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검찰 총장을 흔들어 낙마시키기 위한 의도성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국정원 사건을 둘러싼 법무부와 검찰의 반목, 법무부의 검찰총장에 대한 유례없는 감찰, 이명박 정권의 추천위원회에서 추천 받은 데다 인사 청문회에서 유일하게 야당의 환영을 받았다는 점 등이다. 정권의 칼이 아니라 정권을 향한 칼이 된 검찰 길들이기로 보는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보면 조선일보는 검찰 길들이기에 나선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한 셈이다.

우리는 이 사건 자체보다 이 사건이 드리운 그림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1세 어린이의 인권도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가 인권을 운위 할 수 있는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검찰 총장의 일생을 망가뜨릴 공작을 하는 나라가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는가. 거기에 놀아나는 신문이 정론지를 표방할 수 있는가 등이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 빈부, 동서를 달리 하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 혼외 아들이 확인된 상황이라도 지켜주어야 할 인권과 명예는 지켜주고, 민주적 절차는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다운 모습이다. 원칙이다.

대한민국이 박 정희 정권 시대의 대한민국과 같아서는 안된다. 조선일보가 선데이 서울이 되어서도 안된다. 대통령의 혼외 자녀에 관한 소문이나 주장도 있었다. 대통령들은 탈 없이 그냥 넘어갔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