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윤/ 서울 송파구 잠실본동・영광읍 남천리

지난주 북악산 산행때 일명 사모바위 아래에 있었던 19681.21 사태 때 북한군 124특수부대원들이 은신했다는 장소를 둘러보았습니다.

북한의 대담한 도발사건이 난지 벌써 올해로 46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남과 북의 대치상황은 계속되고 있으니 통일의 꿈은 요원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45년 전의 사건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일요일인 어제 지금도 그때 당시의 총탄흔적이 남아있는 북악산 김신조 루트 산행을 하였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북한의 테러와 만행(청와대 코앞까지 쳐들어와 총기를 난사한 사건)을 잊어선 안 되며 안보는 우리를 보호하는 중요한 가치임을 깨달았습니다.

46당시(121일 일요일 밤 1015) 청와대에서 300m 떨어진 경복고 후문 앞길에서 총성이 울리면서 북한 무장공비들을 가로막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고. 곧이어 출동한 수도경비사령부 장병과 무장공비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북한 무장공비들은 민간인이 탄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까 넣고, 온통 조명탄으로 하늘이 대낮처럼 밝으면서 시민들은 무서워서 콩 볶는 총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썼었습니다. 격전 끝에 게릴라 29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생포했고 한 명은 북으로 달아났습니다. 우리 쪽에선 민간인 5명을 포함해 30명이 숨지고 50여명이 부상했습니다.

‘1.21 사태’ 46주년이 됐습니다. 19681. 우 씨4형제의 신고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당시 초리골 삼봉산 아래에는 우 씨 집성촌 친척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우민제 이장도 나무하러 가던 멤버 중 한 명으로 그날 오전까지만 해도 형들과 함께 산에 올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심 이후 4명의 우 씨 집안 형제들만 집을 나섰는데요. 그들이 바로 무장공비들과 조우한 우 씨4형제입니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우희제(30)씨와 우경제(22)씨는 서로 형제고, 우철제(21)씨와 우성제(20)씨는 6촌간으로 현재 우경제(인천 거주)씨와 우성제(일산 거주)씨만 생존해 있다고 하네요.

이들 가운데 공비들에게 가장 먼저 붙잡힌 사람은 우민제 이장의 친형인 우철제 씨입니다. 우성제 씨와 한 조를 이뤄 먼저 산에 오른 우철제 씨는 우성제 씨보다 위쪽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다는데요. 갑자기 국군복을 입고 총을 멘 남자 5명이 그에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어이 동무! 좀 쉬었다 하라우.”

그들은 우 씨에게 말을 걸더니 순식간에 포위하듯 둘러쌌답니다. 그리고 잠시 앉아 함께 쉬더니 왜 혼자냐고 물었다는데요. 알고 보니 마을에서 우성제 씨와 함께 올라오는 걸 지켜봤던 겁니다.

직감에 간첩임을 알아차린 우철제 씨. 하지만 그들의 지시로 땅에 누운 채 우성제 씨를 부르게 됩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우성제 씨가 아래쪽에서 올라왔고, 두 사람은 공비들에 의해 바위 쪽으로 향하는데요. 그곳에는 국군 복장을 한 병력이 더욱 많았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 너머에서 나무를 하고 있던 우경제 씨와 우희제 씨도 공비들에게 차례로 납치되고, 우 씨4형제는 바위 밑에 한데 모여 두려움의 시간을 보냅니다.

무장공비들은 우 씨 형제들을 감금하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재밌게도 감금이라는 단어의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됐다고 하는데요.

공비들은 누더기 옷을 입은 형제들이 처량해 보였는지 직접 가져온 알코올램프로 마른 오징어를 구워서 주는가 하면, 일제 시계까지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 일주일 후면 적화통일이 되는데 북한에 오면 대학까지 보내주겠다는 등 계속 자신들을 과시했다는군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날이 어두워지자 우 씨 형제들을 어떻게 처리할 지 공비들 간의 생각이 나눠졌다는데요. 결국 모의 끝에 살려주자는 의견이 우세해 풀어줬다고 합니다.

그들은 왜 위험을 감수하고도 형제들을 그냥 놓아줬을까요.

추후 김신조가 쓴 책과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공비들 간의 투표 끝에 살리자는 의견이 많았다고 합니다. 여기엔 시신을 처리하려면 매장을 해야 하는데, 얼어붙은 땅을 파기 힘들어 보내줬다는 이유도 있다더군요. <중략>

언제부터인가 안보 무관심으로 인하여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같은 일이 벌어져도 북한을 비난하면 오히려 낡은 사람이나 수구꼴통 취급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1·21 사태를 겪었던 세대는 세월에 풍화(風化)돼 바랬고. 젊은 세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세월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주도 세력들이 무관심속에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던 그 순간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애쓴 탓일 것입니다. 위기에서 배우지 못한 국민은 언젠가는 다시 위기의 시간을 맞고야 만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북한 10대 강성대국 발언을 분석하면 EMP폭탄을 투하하여 한국군의 모든 전자기기를 무력화시키고, 미리 파놓은 땅굴을 통하여 특수부대원을 투입하여 남한 주요도시를 점령하여 그들의 적화야욕을 이루려고 하는 것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도시 전에서는 경찰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평소 모든 경찰의 사격훈련을 강화하거나 전 경찰의 군 체험 행사를 의무적으로 실시하였으면 합니다. 나라 지키는데 군과 경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그날의 일을 되새기며 안보의식을 다져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