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양병설-율곡 이이(2)

영광백수출신/ 광주교대 교수/ 철학박사

당시 조정에서는 붕당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종직 학파의 계통을 이은 김효원의 집이 동대문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에 모이는 사람들을 동인(東人)이라 부르고, 인순왕후 심비(조선 제 13대 명종의 비. 선조가 즉위한 직후 잠시 수렴청정을 함)의 세력을 등에 업은 심의겸의 집이 서대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모이는 사람들을 서인(西人)이라 부르면서 이른바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겨난 것이다. 동인들은 주로 젊은 신진세력이었고, 서인은 대개 연로한 사대부들이었다.

율곡은 조정이 분열되는 것을 크게 걱정하여 임금에게 탕평책을 쓰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김효원은 함경도의 부령부사로, 심의겸은 개성유수로 전근해갔다. 그러면서 임금은 율곡에게 모든 탕평책을 일임하였다. 율곡은 양쪽으로부터 초연하여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동서화합에 온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다 서인 중에 송강 정철을 비롯한 율곡의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동인 측으로부터 그가 서인을 옹호한다는 의혹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 율곡은 현명한 학자로서, 임금의 총애를 많이 받긴 했다. 그러나 과감한 정치가는 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조정은 당파싸움에 들끓고 임금은 임금대로 후궁에만 빠져있으니, 이것을 보다 못한 율곡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릉으로 내려가고 만다.

그러나 북으로는 여진족이 호심탐탐 조선을 노리고 남으로는 왜구가 노략질을 일삼는 데도 조정은 여전히 붕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율곡은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고 나선다. 유성룡이 도승지로, 율곡이 국방정책을 총괄하는 병조판서로 있을 때였는데, 서울에 2만 명, 각 도()1만 명씩의 군사를 양성하여 배치하라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종8품 정도의 벼슬에 머물러있던 이순신을 천거하면서 장차 3(三韓-한반도의 남부지방)을 구제할 인물입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이 이러한 건의를 묵살하였던 바, 결국 율곡이 죽은 지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때서야 유성룡은 율곡이야말로 참으로 성인(聖人)이시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송강 정철에게 사람을 쓰는데 파당을 가리지 말라고 당부한 이튿날, 선조 17(1584) 116일 새벽이었다. 율곡은 손톱을 깎고 몸을 씻은 다음, 조용히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의건(衣巾)을 바로 잡은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 여덟이었는데, 집안에 남은 유산이라고는 부싯돌 한 개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의 부음을 들은 임금의 통곡소리가 밖에까지 들렸고, 그의 출상 날에는 골목마다 사람들의 곡하는 소리가 진동하였으며, 밤에는 시민들이 치켜든 횃불의 불빛이 서울 교외 수십 리 밖에까지 비쳤다 한다.

퇴계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이 일종의 관념론이라면, 율곡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은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은 무릇 일어나게 하는 것은 이()이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기()이다. 사단(四端) 역시 기가 일어나, 기가 그것을 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퇴계의 영남학파와 율곡의 기호학파(畿湖學派)는 서로 대립하여 쌍벽을 이루었던 바, 퇴계가 금욕주의를 부르짖은 데 대하여, 율곡은 최소한의 물질적 욕구를 인정하였다. “먹어야 할 때 먹고, 입어야 할 때 입는 것은 성인(聖人)이라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그의 냉철한 현실인식과 여러 가지 처방은 후에 실학(實學)의 모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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