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기/ 난원 노인복지센터장

세계를 감동시켰던 1인 창무극의 대가, 이 시대의 진정한 예인, 가장 서민적인 최고의 춤꾼. 그렇다. 우리 지역이 낳은 불멸의 예술가 공옥진 여사를 지칭하는 수식어들이다. 걸쭉한 입담에 타고난 예술적인 끼로 서민들을 웃고 울리던 큰 별이 떨어진지도 벌써 두 해가 지났다. 무명저고리에 버선 한 켤레, 부채 하나를 들고 무대에 오르면 단숨에 좌중을 휘어잡았던 위대한 광대! 공옥진. 소리와 춤, 재담과 연기, 이 모든 재능을 한꺼번에 완벽하게 갖춘 예인이 우리 시대에 어디 또 있었으랴!

지난 616(음력 519)공옥진 여사의 2주기 추모일이었다. 추모일을 4일 앞두고사회복지법인 난원에서 추모식 및 사랑의 점심나눔 행사가 진행되었다. 유족과 난원’, ‘영광기독병원임직원들을 비롯해 지역의 어르신 등 250여명이 함께한 이 자리는 공옥진 여사의 유일한 혈육인 김은희씨의 제안으로 마련되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난원에서 지극정성으로 모셔준 깊은 인연이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준 결과다. 외동딸 김은희씨가 공옥진의 밥차봉사대를 만들어 매달 난원으로 와서 어르신들과 장애인들께 식사대접을 한지도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다. 어찌 보면 별세한 당신의 어머니를 잊지 말아달라는 몸부림 같기도 하여 고마우면서도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미안했다.

공옥진 여사가 떠난 지도 어언 2, 그 추모일을 맞아 예인이라는 이름에 가려져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간 공옥진을 지금쯤 새로 조명해보는 것도 의미가 매우 크리라. 무엇보다도 그녀를 그저 예술가로만 기억하기엔 인간적인 매력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지역에서 살아 온 어르신들이라면 알다시피 그녀는 누구보다도 정이 많았다. 나누는 것도 즐겼다. 특히나 약자인 노인과 장애인들을 무척이나 아꼈다. 공연을 통해 돈이라도 쥐게 되면 어김없이 이웃에 사는 노인들껜 먹을거리가 돌았다. 특유의 해학과 풍자로 서민들의 애환과 아픔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그의 감수성은 바로 이런 그의 따뜻함에서 비롯된 것일 터.

공여사께서 별세하기 1년 전부터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필자의 기억엔 그녀의 인자한 눈빛과 정다운 손길이 아직도 또렷하다. 작은 체구로도 일단 무대에 올라서면 수 천 명의 관객을 사로잡았던 그 엄청난 카리스마 뒤엔, 정 많은 인간 공옥진의 또 다른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다.

공옥진하면 떠오르는 춤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 없이 병신춤이라고 하겠지만 정작 공여사는 병신춤이라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내 남동생은 언어장애인이었고, 손수 키운 조카마저 장애인이라 누구보다 장애의 고통을 나는 잘 안다. 나는 단지 그들의 한과 아픔을 사람들이 알도록 춤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야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함께 어울리는 세상이 될 거라 믿기 때문이었다그녀가 사회복지사인 필자에게 유언처럼 남긴 말이었다. 장애인을 폄하했다며 공여사께 항의를 하던 장애인 단체에서도 이 같은 사연을 듣고 함께 울었다고 하니, 가히 전문 사회복지사가 따로 없다.

사람의 피는 역시 못 속이는 걸까? 공여사께서 생전에 가졌던 그 베풂의 정신과 나눔의 정신은 외동딸께로 오롯이 이어졌다.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은 봉사활동으로 꽃피워졌다. 독실한 불자인 외동딸은 광주에선 벌써 20년째 어르신들께 식사대접을 해주는 알아주는 봉사꾼이다. 모전여전이 따로 없다. 이날 난원에서 열린 2주기 추모식은 소박했으나 이어진 점심 나눔 행사는 성대하기 그지없었다. 김은희씨를 대장으로 하는 공옥진 밥차봉사대의 손길로 만들어진 점심은 그렇게 행복한 소통, 아름다운 동행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1인 창무극의 선구자로써 민초들의 한과 설움을 가장 서민적인 방식으로 잘 표현했던 우리 시대의 위대한 광대를 추모하는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참에 그녀의 업적도 기리고, 가장 큰 삶의 철학이었던 나눔과 베풂의 정신도 널리 알리고 싶었지만 티끌만큼의 성과에 그쳐 아쉬움이 진하다.

지난 2010, 국립중앙극장. 무대와 관객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강했던 공옥진 여사의 마지막 공연. “죽지 않으면, 이 공옥진이가 죽지 않으면 (무대로) 또 오겠습니다라던 그녀의 약속은 결국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한 명의 위대한 예술가는 한 국가의 정신이자 역사이다. 위대한 예술가를 잊는 다는 건, 결국 국가의 정신과 역사를 잊는 것과 같다. 그를 잊지 않는 것, 이제 우리 살아있는 자의 몫이다.

그녀가 즐겨 불렀다던 기다리는 마음눈물 젖은 두만강이 애잔하게 흘러나오는 추모식 앞자리. 생전 공여사가 입에 자주 올리던 오메반갑소! 많이들 묵고 가시오. 글고 고맙소...”라는 말이 적힌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녀의 춤사위가 오늘따라 유독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그 순간,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저 하늘에서 여전히 훨훨 춤추고 있을 이 시대 진정한 예술가였던 인간 공옥진이가, 사회복지사인 내게 던진 또 다른 질문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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