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혈한 철학자-마키아벨리(2)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였던 마키아벨리는 가능한 한 자기의 고향(피렌체)을 중심으로 조국이 통일되고 위대한 국력을 되찾을 수 있기를 열망하였다. 그리하여 이 소망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로마교황청에 대하여 격렬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군주론󰡕을 비롯한 여러 논문을 통하여 오직 국가의 자기보존과 권력 장악만이 모든 정치행위의 유일한 목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도발적이고 냉혹한 사상이 나오게 되었을까? 마키아벨리가 놓여있었던 시대상황은 대내적으로는 이탈리아가 쪼개지고, 대외적으로는 유럽의 강대국들이 이탈리아를 나누어 가지려고 다투던 시기이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운명 앞에서 그는 분노했고, 절망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철학자로서 조국에 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를 궁리해냈고, 그것이 바로 냉혹한 현실에 바탕을 둔 철학의 창출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마치 자연 과학자가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현상을 관찰하듯이, 모든 도덕적 선입견을 배제하고 유럽제국의 정치 형태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치 현실에 입각한 통치자의 처세술에 대하여 귀납적 원칙을 끄집어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상 전무후무한 독창적인 사상을 만들어냈던 바, 사실 그의 사상은 언뜻 보면 무자비하고 냉혈적인 것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그러한 충격은 고대로부터의 모든 철학사상이 인간은 무조건 선하고, 이 사회나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도덕적인 어떤 원리가 반드시 지배한다.”고 하는 인습적인 주장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 그것은 우리가 무비판적이고 인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한 도시국가였던 피렌체(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 모직물, 귀금속, 금융업 발달)는 일대 변혁을 겪어야만 했다. 오랫동안 교황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피렌체를 통치해왔던 메디치 가문(1400년부터 약 300여 년 동안 공화국의 실제적인 통치자 역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천재화가들을 후원하고 학문과 예술, 철학을 장려함으로써 르네상스 시대를 활짝 열어갔음)이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새로운 공화정이 실시된 것이다. 이 변혁의 해에 마키아벨리는 신생 피렌체공화국 제2서기국의 서기라고 하는 직책을 맡아 최초로 관리(공무원)가 되었다. 그리고 4년 후에는 서기장으로 승진하여 14년 동안을 봉직하였는데, 이 동안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특사로서 로마교황, 각국의 왕 및 재상 등 수많은 권력자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렇게 보았을 때,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정치인들에게 충언을 해주는 이른바 브레인트러스트’(싱크 탱크, 두뇌집단)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권모술수를 내둘러 크게 남의 이목을 집중시킨 일은 없었으며, 사실상 그만한 지위에 있었던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겁이 많은 그의 성격상, 당시 막강했던 메디치 가문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군주론>을 썼다는 설에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습적인 도덕규범으로부터 현실정치를 해방시킨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근대적인 국가관이나 정치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는 권모술수를 의미하는 마키아벨리즘의 부정적 이미지도 따라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현실에 대하여 냉철한 관찰과 분석을 가하고, 또한 그것을 가차 없이 표현할 용기를 지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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