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칠공예 세계만방에! ‘구영국 명인’

제주와 한반도 남해안에서만 자생하면서 그 가치를 중국이나 일본에서 먼저 인정받은 황금나무라는 별명을 가진 황칠나무. 특히 서해안의 요충지 영광군이 새로운 환금성 작물로서 황칠은 최적의 재배조건을 구비하고 있어 임업 분야에서도 그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이번 기획취재를 통해 황칠의 새로운 조망에 대해 입체적 분석과 추후 비전, 그리고 차세대 위상에 대한 논점 등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UN이 공인한 세계 최고 황칠명인

지난 216일 대한민국에서 세계 최초로 UN세계재활기구(WRO) 세계유산보전위원회에서 지정한 세계무형문화재(WICH)가 탄생했다. 그 주인공은 백제시대의 황칠문화를 오늘날에 되살린 황칠분야(Golden lacquered areas) WICH 기능장인 1호로 선정된 구영국(55) 명인!

유네스코(UNESCO)에서 지정하는 세계유산이나 인류무형문화유산(세계무형문화재)이 관습이나 종목 등에 부여된다면, 유엔재활기구 세계무형문화재는 그 기술을 보유한 인물을 직접 지정하는 것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세계무형문화재 지정과 관련 구영국 명인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향해 선조의 유산과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힌바 있다. UN세계재활기구(WRO) 세계무형문화재 기능 장인으로 선정되려면 15가지 항목을 일괄 충족시켜야 하는데,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격으로 그 관문은 첩첩산중이다. 현재는 아직 2호를 출현시키지 못하고 있다. 일일이 다 열거하지는 못하지만 기준을 예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종사기간 35년 이상 개인전시회 20회 이상 국제논문 게재 발명특허 2건 이상 유물재현과 보존에 헌신 전수교육(대학, 대학원, 국가연구기관) 국제간 문화외교(대사급) 해외대통령 선물 제작(3점 이상) 세계 유수언론 보도

미술학 박사이기도 한 백사(白士) 구영국 명인은 2002년 신미술대전에서 대상을, 2003년 대한민국 전통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200812월에는 세계미술협회주관 제28회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해외에서도 프랑스 파리 국제박람회, 벨기에 왕국 전통공예, 미국 세계예술페스티벌 등에 두루 초대된 구영국 명인은 현재 국가문화재보존협회장과 필리핀 국립 이리스트(Earist State) 대학교 종신석좌교수를 맡는 등 국내외로 그 진가를 한층 발하고 있다.

 

 

나전칠기서 황칠공예로 천상의 소명

구영국 명인은 황칠보다 먼저 나전칠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9, 친구 집을 찾았는데, 정말 사람 손으로 만들었을까 싶을 만큼 번쩍번쩍 빛나는 것을 목도했다. “지독히도 화려했던 물건은 나전칠기였죠.” 혼을 빼앗은 아름다움은 한 청년을 칠공예에 헌신하게 했다. 정계훈, 신강작, 이택영 선생 등 공예 장인들에게 수학하던 시절에는 밤잠을 잊고 전통공예 디자인에만 몰두했다. 선생의 집에서 기숙하면서 1년 동안 학그림만 그리며 수련했다.

이렇듯, 구영국 명인은 옻칠에다 나전칠기 작업과 전통공예 디자인까지 두루 섭렵했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고민에 휩싸이자 잠시 머리를 식히러 1985년 김제 금산사에 내려간다. 사찰의 노스님은 백제시대부터 전래된, 사람의 손으로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신비의 도료가 있다.”면서 황칠을 소개했는데, 한지에 싼 조그만 호리병을 보여준다.

스님이 알려준 황칠은 단번에 그의 심신일체를 사로잡았다. 구영국 명인에게 2세기 전 맥이 끊긴 황칠공예라는 새로운 대업이 생긴 계기였다. 하지만 황칠을 아는 사람도, 구체적 기록도 없었다. 홀로 조약돌, 나무, 종이 등 온갖 사물에 칠해가며 황칠을 연구했다.

황칠공예에 구영국 명인의 또 하나 일대 전환점은 1990년대 일본 규슈(九州) 공대에 시찰을 다녀오면서부터다. 황칠에 대해 일본인 교수의 체계적 연구에 적잖이 당황한다. “분명 우리 한국에서 건너갔는데 한국에서는 맥이 끊긴 전통공예가 일본에서 자세히 연구된 것을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일본의 실증적 문헌적연구에 자극받은 구영국 명인은 해외에 활발하게 우리의 황칠을 알리기 시작한다. 부단한 연구와 실험의 산고 끝에 재탄생한 구영국 명인의 황칠(Gold Lacquer) 작품은 1991년 청와대 신축본관 및 영부인 접견실에 문갑, 화장대, 이층장 등이 전시될 정도로 주목받았으며, 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미국·브라질에서 열린 박람회 등에 출품돼 연신 호평 받았다.

 

 

설레이는 미소! 다시 찾아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에서 줄곧 상납을 요구할 정도로 화려한 광채를 띠는 황칠은 200여 년 전 숨이 멎었다. 그러나 천우신조일까! 황칠 유품과 도료의 발견은 구영국 명인에게 천군만마를 얻은 그 이상 이었다.

201110월 충남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백제 의자왕 갑옷은 황칠(黃漆)로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국내에서 황칠 유물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에 앞서 200728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6년 경주의 황남동 신라제사(祭祀) 유적에서 흙 그릇에 담긴 채 발견된 유기물 덩어리가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의 성분분석 결과 황칠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신비의 금빛 천연도료로 알려진 1천년 전 황칠이 첫 확인된 것이다. 연구 결과는 전남 해남의 황칠나무의 황칠과 성분이 똑같고, 해남과 완도 산 황칠에만 함유된 베타 셀리넨’(β-selinene) 성분도 검출되어 기쁨을 더했다.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던 금빛 천연도료 황칠을 첫 발견한 날, 국내 유일의 황칠공예 구영국 명인은 뛸 듯이 기뻤다. 황칠공예 작품, 아니 그 역사적 흔적만이라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닌 지난 20여 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백제유물과 신라황칠의 보전 확인은 구영국 명인에게 양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매일 오후 6시부터 새벽 4시까지 집중이 잘 되는 시간에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이물질이 떨어지지 않는 깨끗한 상태에서 황칠 붓을 잡는 구영국 명인은 오늘도 부단히 혼신의 힘을 불태우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황칠공예 세계적 명성 구영국 명인

눈물의 바다천우신조 황칠부활

외국 정상! 혼신의 작품 국익선양

 

 

온고지신 황칠예찬론 미학적 근거들은?

신비의 금빛 황칠(黃漆)은 황칠나무 줄기에 상처를 내서 뽑아낸 수액을 정제한 것으로 니스나 래커처럼 투명하면서도 한 번 칠 하면 수백 년 이상 은은한 금빛을 잃지 않는 천연 도료다. 황칠은 그 빛깔이 몹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나무나 쇠에 칠하면 좀과 녹이 슬지 않고 열에도 강해 옻칠 천 년, 황칠 만 년으로 통한다.

문헌에는 황칠을 예찬한 기록이 많다. 황칠을 모르는 사람들도 황칠을 보면 한눈에 그 아름다움에 눈뜨게 된다. 은은한 황금색에 내열·내수·내구성이 강한 황칠은 고대부터 공예품의 표면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황금은 화려하지만 은은하지 못하다. 여기에 다시 황칠(黃漆)을 하는 연유도 이 때문이다. 황칠은 볼수록 마음을 편하게 하며 보면 질리지 않는 빛을 낸다.

 

 

세계 각국 정상에 헌정한 공예작품들은?

여기에 일일이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세계 각국의 대통령과 총리 등 정상과 수반에 헌정하는 선물은 국가의 최상급 예우이자 그 나라의 전통-현대의 얼굴이기에 스스로 혼연일체의 심성에 녹아들어가야 한다. 작품에 쏟는 각고와 혼신은 두말할 필요 없다.

지난해인 2013년 라오스 촘말리사야손 대통령(Choummaly Sayasone)께는 황칠 가야토기가 봉헌되었다. 2011년은 브라질 최초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에게 황칠 명성황후어보가 빛을 발했으며, 2010년에는 하토야마 총리(hatoyama)황칠 이도다원이 미소 지었다. 또한 동년 스리랑카 마힌다 라자팍사’(Mahendra Rajapaksa) 대통령에 황칠 잔으로 양국 간 우의를 증진시켰다.

2008트라이안 바세스쿠’(Traian Basescu) 루마니아 대통령에게는 황칠문양접시가, 2007에는 하인츠 피셔’(Heinz Fischer) 오스트리아 대통령께는 황칠 향합(香盒)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2세기 단절된 기적적 황칠 부활은?

나전칠기에서 황칠공예로 저의 예술 인생의 분기점을 이룬 1985년에 전북의 김제 금산사를 찾은 그날 이후 눈물의 바다라고 표현할 만큼 지난한 연구 과정을 통과했다. 몇몇 문헌에만 기록이 남아 있을 뿐 세부적 기법이나 제작 과정이 전무했기에 정작 국내에서는 규명할 수 있는 근거가 전무했다.

장인에서 장인으로만 승계되던 전통기법이 후계자가 없어 단절됐기 때문이다. 당연히 황칠공예의 전수도 불가능했다. 더욱이 황칠나무를 구하기 어려운 데다 수액 채취량 또한 극소량이다. 15년 이상 자라야 수액 채취가 가능하고, 채취량은 나무 당 평균 8.6g에 지나지 않는다. 아예 황칠액이 나오지 않는 황칠나무도 많아 황칠은 원료 자체를 구하기 매우 힘들다.

황칠나무에 상처를 내면 나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유백색 액을 분비하는데, 바로 이 수액이 황칠이다. 처음에는 유백색이던 수액이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황색으로 바뀐다. 황칠 수액을 정제해 다양한 색상이 나오도록 첨가제를 넣으며 농도를 맞추는 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다. 한 번 칠하면 1천년 이상 은은한 금빛을 잃지 않는 천연도료 황칠의 맥을 다시 이은 것이다.

 

 

생활속 황칠공예구현 책무와 소임은?

전통공예 본질은 예술이기 이전에 생활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전통공예가 외면 받는 이유는 현대공예와 접목시켜 조화와 발전을 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칠을 널리 알리고 제가 가진 달란트를 사회에 조금이라도 환원하고 싶어 작품전을 갖는데, 황칠 생활용기를 많이 선보인다.

황칠을 일상과 호흡할 수 있게 골프채, 지갑, 벨트 버클, 지팡이, 식기, , 차기, 만년필 등에 접목을 확대하고 있다. 당대에 가장 어울리는 일상의 예술이었을 때 후대에도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시대에 어울리는 디자인 창조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첨언하면, 문화와 예술의 트렌드는 핸드메이드로 만든 수작업 작품이 한층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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