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가 누구일까?-강유위(3)

서태후(西太后, 1835~1908)는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만주족 출신인 그녀의 어린 시절은 매우 빈곤하여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인 영록을 버리면서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 했다. 열여섯 살에 궁녀가 되어 자금성에 들어간 서태후에게는 새로운 야망이 있었고, 거기에다가 젊음과 미모, 묘하게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말솜씨가 있었다. 그녀는 황제인 함풍제 주변 내시들의 환심을 샀고, 곧이어 황제의 눈에 들어 황제의 유일한 혈육 아들을 낳았다.

이로 인하여 서태후는 일개 궁녀에서 일약 귀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황제의 후궁으로, 황태자의 모후로 조용하게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녀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물론 함풍제는 그녀의 마음에 담긴 야망을 무척 경계하여 심지어 살해할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그러나 1860년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과정에서 함풍제는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리고 여섯 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 자리에 오르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했다. 수렴청정은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같이 했지만,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문맹(文盲)이었던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정치의 모든 것을 맡겼다. 이때 서태후는 비로소 서태후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황제의 궁을 가운데 두고 두 여인의 거처가 동쪽과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수렴청정 초기 서태후는 황족인 공친왕과 힘을 합하여 청나라의 부국강병정책에 힘을 기울여 태평천국의 난도 완전히 진압하는 등, 그녀의 통치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서태후에게 아들인 황제는 눈엣가시였다. 더욱이 아들 동치제는 생모인 자신보다 덕스러운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동치제의 부인)도 동태후의 가문에서 골랐던 터였다. 지방의 몰락한 관리의 딸인 서태후로서는 쉽게 다룰 수 없는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가 들어온 것이다. 이에 서태후는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환락 쪽으로 돌리게 하였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조종을 받은 환관(내시)의 손에 이끌려 궁궐 밖 홍등가(사창가)에 드나들다가 마침내 몹쓸 병에 걸리고 만다. 이때 서태후는 아들 동치제가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나자 그의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서태후는 동치제를 이을 다음 황제로 함풍제의 동생(서태후의 시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광서제를 선택하였다. 따지고 보면,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였던 것이다. 즉위 당시 광서제의 나이는 불과 네 살이었다. 이는 서태후 자신이 수렴청정을 통하여 계속 중국을 다스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광서제는 서태후 앞에서 기 한번 펴지 못했고, 황후를 맞이할 때에도 서태후 가문의 여인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다가 1889, 서태후는 갑자기 황제의 친정(親政)을 선포하고 자신은 자금성 북쪽에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겉으로는 광서제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뒤로 물러난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위장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궁궐과 조정에는 서태후의 사람들뿐이었고, 황제인 광서제는 자주 이화원으로 문안인사를 와서 서태후에게 국정(國政)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야 했다. 서태후는 그야말로 황제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력이었던 셈이다. <다음차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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