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의 극단적인 사치-강유위(4)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그럼에도 어떻든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청나라의 제11대 황제)였다. 어엿이 성인이 된 광서제는 서태후의 전횡으로 기울어가는 자신의 나라를, 자기가 직접 통치하고 싶었다. 황제로서의 좁은 입지를 벗어나기 위해 그가 생각해낸 것이 청일전쟁이었다. 그는 서태후를 졸라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예상 외로 강했다. 거기에다가 전쟁의 승리가 광서제의 위상을 높여줄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방해공작도 덧붙여졌다. 그녀는 전쟁 중에 군비(軍費)의 일부를 빼돌려 이화원(베이징에 자리한 황제의 별궁)을 치장하는 데 썼던 것이다. 그 결과,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이 나고 말았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광서제는 지식인층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받아들여 나라도 부강하게 만들고 서태후의 치마폭으로부터도 벗어나보고자 하였다. 이때 캉유웨이(강유위), 링치차오(양계초)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로 변법자강(變法自疆)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이들의 개혁운동은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았다.

이에 개혁파와 광서제는 당시 군부세력으로 뜨고 있던 위안스카이(원세개)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양쪽을 비교하다가 서태후 쪽을 선택했다. 그는 서태후의 애인으로 소문난 영록(의화단 사건을 진압한 청나라의 유명한 장수)을 찾아가 광서제의 모든 계획을 낱낱이 고발했다. 정보를 입수한 서태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광서제를 자금성(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궁궐) 영내에 유폐시켜 버리고, 변법자강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강유위를 비롯한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이제 서태후의 독무대가 차려진 셈이 되었다.

이때부터 서태후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 중국 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사치와 향락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백은(白銀) 100만 냥이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으며,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여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다. 그리고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다. 비취 팔찌, 비취반지뿐만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극단적인 모습은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이다. 앞서 말한 대로,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치장하였다. 그 가운데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아, 보는 이의 혀를 내두르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함풍제가 죽고 27세에 젊은 과부가 된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였다. 영록은 평생의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하였다. 서태후는 그 외에도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남자를 취했고, 수시로 갈아치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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