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지 않은 가족관계--공자(2)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 교수/ 철학박사

공자는 생계를 위하여 노나라의 3대부 가운데 하나인 계손 씨 집안에서 양곡을 관리해주어야 했다. 이때 충실하게 일을 보아준 결과, 얼마 후에는 목장관리인으로 승진할 수 있었는데, 역시 가축이 잘 번식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주공(周公-주나라 왕조를 세운 문왕의 아들. 예악과 법도를 제정하였음)을 제사지내는 태묘(중국의 역대 제왕들이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던 곳)에서 조그마한 직책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는 매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이것저것 묻기에 정신이 없었고, 사소한 절차 하나라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공자는 열아홉 살 때 어머니의 권유로 노나라에 와서 살고 있던 송나라 사람 계관 씨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까다로운 성미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버렸다는 설이 있다. 그가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는 <논어>의 기록 이외에는 아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여자는 소인배와 같다느니 다루기 어렵다느니 하는 그의 여성관으로 보아 이러한 설이 옳은 것 같다.

그런데 노나라의 소공(昭公, 노나라의 25대 임금)은 공자의 득남(得男) 소식을 듣고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다산(多産)의 상징인 잉어 두 마리를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공자는 하도 기뻐서 아들의 이름에 잉어의 뜻을 덧붙여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말단 관리인 그에게 왜 임금이 직접 선물을 보낸 것일까? 그것은 아마 공자의 학식과 인품이 궁중에까지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제자들이 공자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자는 그의 아버지를 닮아 체구가 당당하였고 키도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다. 그의 용모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으나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공자의 눈은 크고 길며 이마는 앞으로 높게 나와 황제(黃帝-건국 신화에 나타나는 제왕으로,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군주이자 문명의 창시자)의 모습이요, 팔은 길고 등은 거북의 모양이며 키는 아홉 자 여섯 치(191cm)로 매우 크다. 몸 둘레가 아홉 아름이나 되고, 앉으면 용이 서린 것 같고 일어서면 견우성을 대하는 것 같다.”

물론 다소의 과장이 섞여있을 것으로 짐작되기는 하나, 용모에 관한 한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공자의 나이 스물네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는 당시의 습속에 따라 어머니의 시신을 아버지의 묘에 합장(合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묘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그 위치를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많은 나이 차이가 나는 데다, 또 예식 없이 치른 결혼 등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이야기를 어린 아들에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우여곡절 끝에 공자는 한 노파로부터 부친의 묘를 알아냈고, 마침내 모친을 그곳에 합장할 수 있었다.

공자는 자기의 집을 서당으로 삼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젊었을 때부터 시작한 이 교육활동은 결국 수십 년 동안 무려 삼천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그의 서당을 거쳐 가게 하였고, 그의 명성을 멀리 퍼져나가게 했다. 물론 명예욕이 강했던 그로서는 국가의 지도적 위치에 오르고 싶은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주어지는 벼슬자리가 자신의 도덕적 신념과 일치하지 않았던 관계로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만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의로운 통치자로서의 원칙들을 실천하기 위하여 고향의 관리가 되었을 때는 이미 그의 나이 쉰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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