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돈(1)-서경덕과 소크라테스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오늘날 돈은 인간의 모든 생활을 지배할 만큼,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속된 말로, 돈 때문에 웃고, 돈 때문에 운다. 그렇다면 과연 철학자들은 어땠을까? 그들 중에는 부유한 경우도 있고, 가난한 경우도 있었다. 검소한 경우도 있고, 허랑방탕하게 낭비해버린 경우도 있었다. 돈에 대해 초연한 철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집착한 철학자도 있었다.

먼저, 돈에 대해 초연한 경우. 고려 말의 유학자 서경덕은 현량과(조광조가 설치한 과거시험)를 통하여 선발하는 120명의 인재 가운데 제 1인자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서경덕은 이를 거부하였다. 조정에서는 과거를 보지 않은 그에게 벼슬을 천거했지만, 역시 거절하였다. 쌀이 떨어져 며칠씩 굶고 지내는 판인데도, 조정의 녹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개성의 송악산 자락에 있는 화담에 자리를 잡고, 그 옆에 초막을 지어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제자인 강문우가 쌀을 짊어지고 가보니, 스승이 화담 위에 앉아 한낮이 되도록 사람들과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부엌에 들어가 물으니, 부인은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 밥을 짓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한 번은 역시 제자인 허엽이 그를 찾아갔는데, 장마가 계속되다보니 화담으로 건너가는 냇물이 불어나 있었다. 엿새 동안 기다린 끝에 건너가니, 화담은 태평하게 거문고를 타며 글을 읊고 있었다. 허엽이 저녁밥을 지으려 솥뚜껑을 열어보니, 솥 속에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다. 황진이의 녹록치 않은 유혹을 물리친 그 기개로 화담은 가난과 배고픔을 극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버지가 종사하던 직업이나 가족을 등한히 하고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가난하였던 그는 누추한 옷차림으로 아테네의 시장이나 경기장 등을 싸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아무 쓸모없는(?) 대화나 나누고 다녔다. 지독한 게으름뱅이였던 그가 때때로 돈을 벌어서 가정 살림에 보탬을 주기도 했겠지만, 그것은 극히 미미했다.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무대에서 소크라테스를 맨발로 묘사했던 것 역시 그에게는 신발을 사 신을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무보수로 사람들을 가르쳤고, 기껏해야 저녁 한 끼로 만족하였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아이를 셋이나 가진 젊은 아내 크산티페는 (게으르고 무능한) 남편을 들볶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이 때문에 결국 그녀는 세계적인 악처(惡妻)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실제로는 그리 가난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설도 있다. , 그는 몇 차례 굵직한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당시 아테네 군대에서는 시민인 병사들 스스로가 전투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해야만 하였다. 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은 말을 사서 기병(騎兵)으로 참전하고, 그보다 못한 중산층은 갑옷과 투구를 사 중장갑(重裝甲) 보병으로 참전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사지 못하는 사람은 단순히 돌팔매질하는 병사로 나가곤 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주로 중장갑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에 미루어보면, 평소 맨발인 데다가 형편없이 초라한 옷가지로 유명한 그의 고유 복장은 그가 가난하였다기보다는 욕심 없는 생활을 추구했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시 직업(석수장이와 산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또 그의 수제자인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 가운데 제법 부유층이 끼어있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 가난했다기보다는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온몸으로 가르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가 대화록 <변명>에서 강력히 주장하는 내용, 즉 물질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도록 가르친 내용은 세상 사람들을 향한 의도적인 교훈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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