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돈(2)-디오게네스와 김시습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명실상부하게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린 철학자가 있다. 이미 당대의 기인(奇人)으로 소문난 디오게네스(기원전 400-323)가 거리의 큰 통 속 같은 데서 기거(寄居-덧붙어서 삶)하고 있을 때였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마케도니아의 왕)이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대가 가장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고?”하고 묻자, 디오게네스는 태연히 그것보다도 어서 햇볕이나 가리지 말아 주시오.”라고 응수하였다. 그러자 대왕은 만약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기꺼이 디오게네스가 되겠다.”고 말하며 물러났다고 한다.

디오게네스에게 이 세상의 부와 명예, 권력은 무가치할 뿐 아니라 귀찮은 것이었다. 그것들은 한 순간의 따사로운 햇볕보다도 못했다.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철학대로 무욕(無慾)한 생활, 개 같은 생활을 즐겼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는 일도 없이, 주어진 대로 먹고 아무 데서나 잠자는 생활이 바로 그가 추구하는 삶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큰 통속이나 개집에서 개와 함께 살았는데, 재산이라고는 오직 물을 떠먹기 위해 지니고 다니는 호박으로 만든 그릇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손으로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고, 이 그릇마저 내동댕이치고 말았다고 한다. 인간이 아무런 소유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어왔던 디오게네스이지만, 아직 자신이 철저하지 못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이자 문학가)은 언젠가 종들과 가옥, 전답을 모두 음흉한 사람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다. 한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잠자코 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상대방을 찾아가서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그 사람은 물론 거절하였다. 그러자 김시습은 그 사람을 걸어 한성부(서울의 행정, 사법을 맡아 보았던 관청)에 고소하였고, 그리하여 두 사람이 대질심문을 받기 위해 불려갔다. 보통 양반들 같으면 이런 송사가 있을 시, 종을 대신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는 직접 대질에 임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싸웠다. 결국 송사에 이긴 그는 문서를 받아 관아 문 밖을 나오더니, 하늘을 보고 크게 웃었다. 그리고 아하하,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나?” 하고는 문서를 갈가리 찢어 개천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옷깃을 펄럭이며 돌아왔다.

수양대군이 임금 자리(세조)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김시습은 모든 책을 불살라버린 다음,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기행(奇行-기이한 행동)을 연출한다. 세조의 폭정과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그리고 봉건 권문세력들의 농민에 대한 횡포와 수탈 등에 김시습은 커다란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벼슬의 꿈을 버리고, 시통(詩筒) 하나만 덜렁 등에 지고서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무언(無言)의 저항을 했던 것이다.

수양대군이 임금 자리에 오른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상왕복귀를 꿈꾸다가 정창손 등에 의해 발각되어 참형(혹은 거열형)되고 말았다.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한 후에 일어난, 두 번째의 대량 살육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육신(死六臣-1456년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인물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6. 조선 중기 이후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현재 서울 노량진의 묘역에는 당시 함께 처형된 김문기의 묘도 조성되어 있음)의 시체가 길거리에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거두어주지 않았다. 이때 어떤 중이 이들 시체를 거두어 노량진 길가 남쪽 언덕에 묻었다고 하니, 이 중이 바로 김시습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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