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숙/ 시인 겸 수필가

어느 날,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골에서 봉숭아꽃을 따왔단다. 무료하던 차에 냉큼 달려갔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그녀가 반갑게 맞았다. 그녀와 나는, 매실차를 마시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해질 무렵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어섰다. 그녀가 미리 싸 놓은 보따리를 내게 안겨줬다. 묵직했다. 오이, 가지, 깻잎, 풋고추 등과 함께 그녀의 넉넉한 정까지 더해진 무게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그녀가 봉숭아꽃을 빌미로 나를 집으로 초대한 셈이다. 연분홍, 하양, 주홍빛이 선연한 봉숭아꽃과 이파리는 투명 봉투에 담겨있었다. 봉숭아꽃 봉투를 전해 받는 순간, 울컥했다. 삼 년 전, 이즈음에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들킬세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돌아섰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은 영광군 불갑면이다. 내륙 쪽에 위치한 불갑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고장으로, 불갑산은 사시사철 등산객들의 발길이 잦고, 상사화 군락지로 잘 알려진 관광지다.

뿐만 아니라 암울했던 나의 초, 중학교 시절, 유일한 피난처 같은 곳이기도 하다. 우리 집은 중학교 관사를 포함해 다섯 가구가 채 안된 작은 동네 맨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담장도, 대문도 없는 허름한 집이었지만, 전망은 최고였다. 토방 끝에 서면 오미산자락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징검다리 건너 기와집 너른 마당에서 덕순이가 고무줄놀이하는 모습도 선명하게 보인다.

해마다 여름이면 우리 집 주변엔 이름 모를 꽃들의 향기가 진동했다. 유달리 꽃을 좋아하신 엄마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이다. , 나비를 유혹하던 꽃밭에 나는 자주 머물렀다.

엄마의 꽃밭은 소박하고, 다소곳한 여인의 얼굴을 품은 듯 했다. 밤새 지어놓은 거미집엔 잠자리가 포로처럼 붙잡혀 있곤 했다. 나는 어린 마음에 불쌍해서 잠자리를 구출해서 날려주곤 했다. 아침햇살이 퍼질 즈음, 살포시 꽃봉오리를 접던 연보라 빛 물망초의 청초한 모습은 지금도 아련하다.

기찻길처럼 긴 빨랫줄 지지대를 감고 집 앞 밤나무까지 세력을 넓힌 나팔꽃은 잠꾸러기 막내를 깨우기라도 하듯 연신 기상나팔을 불어댔다. 마당가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온 가족이 멍석에 빙 둘러앉아 엄마 손맛 칼국수를 달게 먹을 때, 소문도 없이 피던 하얀 박꽃은 내가 가장 좋아한 꽃이다. 그 꽃을 보고 있노라면 금세 엄마 품처럼 포근해진다. 봉숭아꽃은 리어카 창고로 쓰던 산모롱이 외양간 주변에 도열하듯 피었다. 여러 색깔의 겹 봉숭아는 꽃 대궁이 유독 튼실했다. 꽃이 피면 엄마는 분주했다.

꽃과 꽃잎, 명반을 절구통에 넣고 콩콩 찧었다. 푸르죽죽한 물이 줄줄 흐를 정도로 다져지면 손톱크기 정도로 모양을 만들어 우리들의 손톱에 하나씩 올리고 잘근 묶어 주셨다. 꽃물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참을성이 없던 나는 엄마 몰래 풀어보다가 지청구를 듣던 기억이 또렷하다.

아침에 잔뜩 기대하고 매듭을 풀면, 손톱뿐만 아니라 주변 살까지 검붉은 물이 들고 쭈글쭈글해진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었다.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고운 빛을 뽐낸다. 첫 눈이 올 때까지 손톱 끝에 꽃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설을 믿으며 우리들은 달뜬 나날을 보냈다. 이젠 봉숭아꽃 찾기도 쉽지 않지만,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네일숍의 그늘에 가려 꽃물을 들이는 이도 없을성싶기도 하다.

지지리도 가난하고, 옹색한 시골 살림에 일곱 명이나 되는 자식을 먹이고, 입히시는 일이 얼마나 대간하셨을까? 꽃밭을 가꾸시며 엄마는 고단한 당신의 삶을 잠깐씩 달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오는 여름휴가에는 짬을 내 엄마가 잠들어 계시는 불갑면 고향 선산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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