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 대기자

103일은 개천절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크게 기억하지 않고 지나간다.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개천절이 큰 국가행사였다. 단군왕검께서 나라를 세운 날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뿌리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단군을 신격화하여 대종교를 창설했던 라철선생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의 근저를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복 후 갑자기 비대해진 기독교 측에서는 단군을 우상으로 치부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기리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개천절이 국경일이면서도 대종교의 교주로 전락한 단군은 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수난을 겪어야 했으며 기념식에는 대통령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나라마다 개국을 계기로 신화적 요소가 없는 나라가 없다시피 하는데 유독 한국에서는 단군을 신화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토가 만연되어 역사를 왜곡하고 오염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날 한국축구클럽연맹에서는 전남 영광군의 유치에 힘입어 제1회 국회의장배 전국대학생동아리축구대회를 영광스포티움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이개호의원이 대독한 격려사를 통하여 축구경기의 유래를 일깨우면서 비록 시대의 흐름은 프로를 선호하고 있지만 여러분과 같은 아마추어가 없으면 프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갈파했다.

전국 대학동아리 32개 팀이 참여한 이 대회는 풀리그로 16강을 먼저 선착시키고 토너멘트로 8강과 4강이 선발되는 경기방식을 택하여 3일 동안 경기장을 달궜다. 영광스포티움에는 보조경기장을 포함하여 네 개의 경기장이 축구전용으로 건설되어 영광군민은 말할 것도 없고 각급 축구팀들이 다투어 다음 시즌에 대비하는 연습경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준성 영광군수는 유달리 축구에 관심을 기울여 지난여름에는 유서 깊은 48회 대통령배 고교축구대회를 유치하기도 했다. 영광하면 누구나 맨 먼저 떠오르는 인상이 굴비. 가장 맛있는 굴비가 밥상에 오르는 것만 봐도 행복하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영광굴비는 전국의 수요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백제시절 영광을 통하여 불교가 전래되었고 불갑사 큰 절은 인도에서 건너온 아라난타존자가 세웠다고 해서 이름이 높다. 우리나라에서 창시된 종교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종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원불교의 발상지 역시 영광이다. 원불교는 영광에서 시작하여 전북 익산에서 꽃을 피웠다. 교육과 의료에 관심을 둬 원광대학교와 한방 의료는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영광대회에 참여한 각 대학팀의 경기수준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우수했다는 평가를 하고 싶다. 그들이 입고 뛰는 유니폼은 어느 프로선수에 못지않은 다양한 디자인으로 특색을 이뤘으며 경기매너는 과연 대학생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깨끗하고 매끄러웠다.

특히 직접 경기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각 팀마다 여대생들이 선수 수발을 전담하며 스탭을 구성하고 있어 경기 흐름에 활력소 역할을 했다. 주최자인 축구클럽연맹 관계자들과 심판들의 친절한 안내와 공정한 경기 판정은 선수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대회를 빛내는데 크게 일조했다.

주최 측에서는 격렬한 경기도중 행여 발생할 수 있는 부상에 대비하여 영광군 보건소의 도움으로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큰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프로선수들을 보면 극심한 태클에 걸려 큰 부상을 당하여 시즌을 망치는 경우도 종종 보이는데 모든 선수들이나 스탭진이 가장 걱정하는 일 중의 하나다.

축구는 골이 많이 터져야 관중도 즐겁고 선수 자신들도 힘이 난다. 그런 의미에서 영광대회는 흥미를 독우는 경기를 보여준 경기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광대회 하이라이트는 105일 오후에 맞붙은 결승전이다. 한남대와 수원대가 용호상박했다. 21의 스코어로 우승은 한남대 차지가 되었지만 두 팀의 경기는 프로팀 보다 더 박력 있는 경기를 보여줘 결승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함께 참관한 한국 축구계의 거목인 오완건선생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선생은 광복이후 초창기부터 축구협회에 간여하여 부회장으로서 7명의 회장을 보필한 분이다. 세계축구연맹(피파)의 경기분과위원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축구의 산 증인으로서 축구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영광에 내려가기 위해서 필자와 한 차에 동행했다. 흥미진진한 뒷얘기를 들으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나는 그에게 회고록 집필을 권했으나 부인의 반대가 완곡하다는 말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의 부음을 들었다. 축구만을 바라보며 세계 축구인들을 교유했던 오완건선생, 유창한 영어로 피파에서 축구외교의 선두역할을 했던 선구자가 떠난 것이다. 향년89세다.

그가 갑자기 떠난 후 피파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징계6년의 중형이 정몽준에게 떨어졌다. 정몽준은 뭐니뭐니해도 한국축구계의 상징이다. 그가 부정으로 얼룩진 블라터피파회장을 강력히 비판하며 차기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6년 징계로 출마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피파를 둘러싼 온갖 부정의 싹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몽준이 어떻게 이에 대처할 수 있을지 궁금하지만 이럴 때 오완건같은 경륜의 인사가 난맥을 헤쳐나가는 축구외교를 펼 수 있지 않을까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오선생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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