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 여민동락 살림꾼

청와대 발 보육대란이 점입가경이다. 중앙 정부와 지방 교육청이 팽팽한 치킨게임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리과정(35세 무상 보육·교육 공통 프로그램) 파행의 근원적 책임은 박근혜 정부에 있다. 시작은 대통령 선거가 있던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명박 정부는 만 5세 누리과정 도입 7개월 만에 3~5세로 확대 시행을 발표했다. 이것은 무상급식 반대 등 보편적 복지 정책 확대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왔던 여당의 당론과는 배치되는 결정이었다. 당연히 대선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다. 걱정은 현실이 됐다. 0~5세 무상보육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연간 4조원에 달하는 누리과정 예산을 교육교부금에 떠넘기면서 지방 교육청과 갈등을 빚었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양극화와 함께 저성장 시대의 도래와 불안정 고용의 증가는 갈수록 복지의 수요를 증대시킨다. 수요가 높기 때문에 정치인들에게 복지는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당선을 위해 각종 복지 공약들을 쏟아내고는 선거만 끝나면 나 몰라라하는 것은 전형적인 책임정치의 실종이자 윤리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누리과정 파행만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기초노령연금 20만원 지급 공약을 파기해 공분을 샀다. 지방자치단체의 유사 중복 사회보장사업을 정비한다는 명분으로 지자체에서 자율적으로 시행해오던 복지 사업의 25.4%를 전면 금지시켰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사회경제적 위기가 증폭되고 있는 마당에 이 정부의 복지 정책은 축소, 파행이라는 내리막으로 치닫고 있다.

복지 파행과 축소의 피해는 고스란히 해당 복지의 수요자들인 국민에게 돌아간다. 이것은 개별 정책 시행에 따른 효과를 따지는 수준을 넘어서는 복지 철학에 관한 문제다. 당장 누리과정만 보더라도 그렇다. 예산을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며 벌이는 재정 논란만이 다가 아니다.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공 보육을 확대해 마음 놓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국공립 보육시설 확대를 통한 공공 보육의 기반 강화와 무상급식, 무상교육, 아동수당과 같은 복지 정책의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복지 정책은 개인과 가정에 맡겨진 돌봄을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방식, 공공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반대로 복지를 사적 영역에 계속 묶어두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돌봄 불평등이 확대된다.

돌봄이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되면 돌봄 서비스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에 따른 선택의 문제가 된다. 아이 돌봄의 질은 전적으로 부모의 경제력에 좌우된다. 어떤 아이는 고가의 사설유치원에 가겠지만, 어떤 아이는 교육은 커녕 방임의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시쳇말로 금수저아이들은 금수저 수준의 돌봄 혜택을 얻는 대신, ‘흙수저아이들은 돌봄의 사각지대에 갇힐 위험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 매커니즘을 지배하는 것은 공공성이 아니라 시장 논리다. 누리과정 파행에 따른 무상 보육 정책의 후퇴는 복지의 계층 간 격차를 확대하고 돌봄 불평등을 확산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거스른다.

돌봄 민주주의확립을 주장한 미국의 정치학자 조안 C. 트론토는 돌봄 결핍민주주의 결핍은 강한 상관성을 갖는다고 했다. 돌봄 불평등이 심화되면 계층간 격차가 확대되고 차별과 배제를 재생산하는 악순환의 늪에 빠진다. 따라서 돌봄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접근해서 풀어야 할 대단히 정치적인 사안이다. 공약 파기와 일방적인 정책 후퇴 등으로 정치가 사회적 돌봄과 공공 복지의 발목을 잡는다면 민주주의의 성숙도 더딜 수밖에 없다. 돌봄 민주주의 확립은 복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한국 사회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 조건이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