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성(2)--에피쿠로스, 토마스 아퀴나스, 사르트르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 교수/ 철학박사

쾌락주의의 창시자 에피쿠로스는 보통의 선입견과는 달리, 쾌락주의와 동떨어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쪽에서는 그가 지나치게 많이 먹고 마셨다고 말한다. 너무 많이 먹은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먹은 것을 토해내야 했으며, 밤마다 벌어지는 잔치에 자신의 정신력까지 모두 탕진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지나치게 사랑의 향락에 빠졌다는 비난도 함께 받았는데, 창녀와의 잦은 서신 교환과 부인들을 은근히 유혹하는 듯한 편지들이 들먹거려진다. 특히 에피쿠로스가 그 여자들 중의 하나와 그녀의 집에서 동거했다는 사실은 당시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어떤 적대자는 열두 통의 음란한 편지를 그가 쓴 것이라고 모함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에피쿠로스가 그 모든 못된 짓을 하느라고 학문 연구에 등한히 하였다고 비난하며, 에피쿠로스와 그의 제자들을 돼지들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평가도 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어쩌다가 가끔 딱 한 잔의 포도주만을 마셨을 뿐 대개는 물을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였으며, 아주 어려운 시절에는 거친 콩 요리로 삶을 지탱해갔다는 것이다. 또 에피쿠로스는 사랑의 향락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가 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라고 하여, 관능적인 사랑을 삼갔다고 한다.

중세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탁발(托鉢-수도자가 집집마다 다니며 동냥하는 일)을 행하도록 되어있는 도미티크 수도회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명예와 권력보다 학문에 관심이 가 있던 토마스에게는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기겁을 하였다. 왜냐하면, 그곳은 가난하거나 몰락한 집안의 사람들이 들어가던 단체로, 부모가 바라던 권력과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어머니는 두 형들을 시켜서 그를 한 성에 강제로 가둬놓은 다음,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내아들은 물러설 줄 몰랐다. 감금 기간은 무려 1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생각다 못한 가족들은 토마스의 계획을 단념시키기 위해 예쁘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를 창부로 꾸며 토마스 혼자 생활하는 독방에 들여보냈다. 그러나 남녀 사이에 있음직한 즐겁고도 황홀한 시간을 기대했던 이 젊은 아가씨는 몸집이 거대한 한 남자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의 손에는 방금 벽난로에서 끄집어 낸 불붙은 장작이 들려 있었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이것으로 요절을 내겠다!”고 외치는 거구의 사내 앞을 떠나, 그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다. 이 장면을 전해들은 토마스의 누이들은 남동생의 경건한 행동에 감동하여 그를 광주리 속에 넣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성에 갇힌 지 2년 만에 그곳을 빠져나온 토마스는 결국 원하던 대로 도미니크 수도사들을 따라갔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한걸음 더 나아가 허랑방탕한 여자를 구출하려고까지 시도한다. 당시 사르트르는 중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있었다. 이 무렵 그의 관심을 끈 카미유라는 미녀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 친구는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잠자리를 같이 하며, 알몸으로 난로 가에 앉아 니체를 읽곤 하였다. 사르트르는 그녀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설득하는가 하면, 편지를 써 보내곤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얼마 후 어떤 연출가와 결혼해버렸다. 그녀와의 기묘한 연애극은 이로써 막을 내리고, 사르트르는 급우이자 여성학자인 보봐르 부인과 계약결혼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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