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울․김연수․박녹주 등 당대의 대가들과 한솥밥 먹어

저자거리 소리ㆍ몸짓을 창무극으로


이미 1960년대에 이르면 전통예술의 주류는 보호와 전승 체제로의 완전한 편입을 지향하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전통 및 민속예술의 부흥을 주요한 정책 과제로 표방했고, 미국에 설립된 아시아재단이나 록펠러재단 등의 해외 문화원조를 받아 홀대 받던 전통예술을 향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1962년에는 무형문화재 제도가 실시되었고 1960년대 이래 40년간 지속된 민속예술경연대회가 정부에 의해 개최되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퓨전적 아이템을 개발하며 시장에서 분투했던 전통 예인들은 어느새 스스로를 보호전승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제도적 지원의 규모를 자신들의 성취 기준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1962년 어느 신문기사에 이런 내용이 실렸다. “국악의 성세가 오늘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적이 일찍 어느 때에 있었단 말인가. 국악사양성소를 보라, 국악예술학교를 보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국악과를 보라.”

제도에 의탁하기로 한 전통 예인들의 기획은 지극히 성공적이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무형문화재 제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국악의 얼개가 정의되었고 고착되었다. 보호전승제도 하의 전통예술 개념은 지금까지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데, 예술은 이제 창작자들의 독창적 세계관 및 행위를 통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원형성을 부여 받은 소수의 작품 및 스타일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되었다. 제도로 편입되지 못한 숱한 전통들은 소멸의 운명에 맞서 시장에서 외로운 분투를 계속해야 했고 예인들의 독학은 더욱 불가피한 것이 되어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예술의 본령은 독학에 있다. 특히 소리꾼들에게 독공(篤工)의 형식은 애시당초 독공(獨工)이기도 했다. 게다가 계보와 관습 그리고 ‘전형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한다는 무형문화재법으로부터 독립적인 예술가들은 자기검열의 최소화를 통해 창의력을 최대치로 뽑아낼 조건에 놓인 것이기도 했다. 삶은 벼랑 끝에 처했어도 예술엔 날개가 달려 있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20세기 전통예술 분야를 통틀어 가장 독창적인 경지를 보여준 이가 저잣거리의 공옥진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임방울, 김연수, 박녹주 등 당대의 대가들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으나 스승의 발성과 몸짓을 간절하게 익히는 대신 거리를 스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갈망했다. 거기에 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자 그대로 시장판에서 분투했고 그 과정에서 1인 창무극의 자산을 마련하였으며 병신춤이라는 새로운 변경에 다다랐다. 물론 그 변경을 넘어가면 옥토가 펼쳐질지 천길 낭떠러지가 나타날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의 인생에 옥토가 펼쳐진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훗날의 놀라운 성취 따위, 추측건대 감히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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