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사랑(3)-키르케고르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피히테와 프로이드처럼 사랑을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간 철학자가 있는가 하면, 니체처럼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사랑을 놓친 경우도 있었다. 이번 호에서는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 주인공은 코펜하겐의 소크라테스라 불리는 키르케고르(1813~ 1855)이다. 덴마크 출신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스물네 살 때에 자기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소녀 레기네 올센을 보고 첫눈에 반하여 그녀와 결혼할 것을 결심한다. 원래 그녀는 자신의 가정교사이자 키르케고르의 친구인 슐레겔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르케고르는 그녀를 끌어들이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의 집을 드나들면서도 일부러 그녀와 상대하지 않는 등의 행동이 효과를 거두어, 3년 후 드디어 결혼 승낙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키르케고르는 엉뚱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결혼이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솔직해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도저히 그녀에게 말하지 못할 문제가 있다.’

이런 생각으로 키르케고르는 약혼녀 쪽에서 스스로 파혼해오기를 바랬다. 그리고 이를 앞당기기 위해, 스스로 혐오스럽고 타락한 인간인 것처럼 보이도록 애를 썼다. 이에 덧붙여 매몰차고도 비정한 말을 던지는데, 약혼녀가 결혼에 대해 물어왔을 때 결혼이야 하지. 그러나 10년 후, 나는 다시 젊어지기 위해 젊은 신부감을 찾게 될 거야.”라고 대답하고 말았던 것이다. 약혼녀가 이 말에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느꼈음은 물론이려니와, 그 역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물론 키르케고르가 파혼을 선언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밖에도 여러 설이 있다. 두 사람의 성격이 도저히 맞지 않을 것 같아 그랬다는 설도 있고, 그가 어렸을 때 나무에서 떨어져 성적 불구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파혼 사건으로 인해 약혼녀의 집안사람들이 분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코펜하겐의 시민들까지 양갓집 처녀를 농락한 패륜행위라고 그를 비난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은 이때부터 전개된다. 키르케고르는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만난 일에 대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일기에 기록하였다. 도시의 어느 거리에서였으며, 또는 몇 시에 어느 교회에서였는지 등등을 꼼꼼하게 써 나갔다. 심지어 그녀가 서 있었는지 앉아 있었는지, 그녀가 웃었는지 웃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신문을 통하여 그녀가 다른 남자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파혼이 있은 후 2년이 지나 올센은 슐레겔과 약혼하고, 후에 결혼까지 하였던 것이다. 슐레겔은 1855년 서인도의 장관으로 부임하였고, 그의 아내도 함께 따라갔다. 막상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키르케고르의 절망은 극에 달하여 몸을 부르르 떨며 일기에 올센의 배신을 비난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또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키르케고르가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한 문제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사창가에 한 번 들른 일이었다. 그곳에 있는 여자와 은밀한 관계를 맺지도 못하고 오히려 조롱만 사고 돌아왔을 뿐인데도 말이다. 보통사람들에게는 별 문제 거리도 못되는 이 실수를 그가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그 자신의 우울증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 우울증은 아버지가 하녀였던 어머니를 겁탈하여 임신을 시키고, 두 아내와 다섯 자녀를 잃게 되는 비극적인 가정환경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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