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아내(2)-아리스토텔레스와 마르크스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플라톤이 세운 인류 최초의 대학)를 떠나, 지난날 함께 공부했던 헤르미아스의 궁전으로 초빙되어 갔다. 그는 아소스(터키의 항구도시 베흐람칼레에 있는 유적지)에 아카데미아의 분교를 세우고, 3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가장 큰 수확은 다름 아닌 결혼이었다. 신부는 헤르미아스의 조카이자 양녀인 피티아스였는데, 군주의 딸과 결혼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나이는 이미 마흔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얻었다. 후일 그녀와 사별(死別)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고향 출신인 여인과 재혼하여, 니코마코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이 아들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지은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죽을 때까지 자상하고 친절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는 죽은 때 유언에서 아내와 자식, 심지어 부리던 노예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공산주의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 하면, 우선 무시무시한 이미지부터 떠오른다. 하지만 그가 한 남편으로서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고 나면, 아마 충격을 받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약혼녀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의 결혼을 서둘렀는데, 이 여성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매우 다르다. 먼저 우호적인 평가부터 들어보도록 하자.

어렸을 때부터 이웃에 살면서 우의가 깊었던 마르크스와 예니는 일생동안 아내, 동지, 친구 사이로, 세계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관계를 지탱해온 모범이었다. 남작의 맏딸로 태어난 예니는 미모와 교양과 재능을 함께 지닌 소녀였다. 네 살이나 위였던 예니를 마르크스가 누나에서 당신이란 호칭으로 처음 부른 것은 마르크스의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하기 위한 모임에서였다. 예니 집에서 열린 이 축하자리에서 그녀는 곧 본(Bonn)으로 유학을 떠날 그에게 나는 당신에게 남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 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으며, 그 뒤 둘 사이는 급진전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다음과 같이 악의에 찬 독설도 있다. “그녀에게는 이미 미남 장교 약혼자가 있었다. 그는 춤을 잘 추고, 스케이트를 잘 타며 포옹을 잘했다. 그러나 사고능력이 약간 부족했기 때문에, 견디다 못해 그녀 쪽에서 파혼해버렸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정은 이렇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약혼에서 결혼에 이르는 7년 동안,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세계 서간 문학사상 빼놓을 수 없는 열정적인 명문이었다. 마르크스는 57편의 소네트(서양에서 유행하던 시의 한 형식)와 발라드(자유로운 형식의 짧은 시)를 써서, 아버지를 통하여 그녀에게 전달했다. 물론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속을 태웠던 예니가 마르크스를 그리워하며 쓴 편지도 명문이다. 이들은 결혼한 뒤에도 일생을 통하여 헤어져 있을 동안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어떤 용건이었든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의 확인이 덧붙여져 있었다.

그런데 너무 악의적이어서 의심스럽기까지 한 소문이 있었다. , 마르크스는 하녀에게 임신을 시켰으며(1851), 예니의 고통은 이때 일생 중 최고조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마르크스는 이 사실을 아내에게 속이고자 하녀의 상대역을 친구인 엥겔스에게 맡겼으며,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엥겔스가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내용이 실제보다 과장되었다 해도, 이 연애사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해프닝(?)이 두 사람의 사랑을 갈라놓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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