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기묘한 행동(3)

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 교수/ 철학박사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화려한 옷을 입고 반지를 끼고 머리를 손질하는 등 남달리 치장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외모가 뛰어났던 것은 아니어서, 차라리 보잘 것 없는 용모를 보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은 스승의 괴팍한 면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잠자는 모습이 특이했는데, 항상 배 위에 뜨거운 기름을 담은 가죽 주머니를 놓고 잤던 것이다. 그가 지병(持病-만성병)인 위장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은 사실로 미루어, 그 주머니는 반드시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자들이 더 궁금하게 여긴 것은, ‘어떻게 수면시간을 줄이며, 또 어떻게 잠에서 깨어나 재빨리 사색하는 자세로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었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스승은 휴식을 취할 때 손에 청동으로 된 구슬을 쥐고, 그 밑에는 그릇을 놓아둔다. 그렇게 해서 스르르 잠이 들라치면 구슬이 그릇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철학적인 사색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미래는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예외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곧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이다. 그는 열 살 때에 입학한 학교에서,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오래 자도 괜찮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늦게 일어나는 것은 일생동안 그의 버릇이 되었다. 학교에서조차 그의 늦잠을 허락하였던 까닭은 그의 건강과 관계가 있다. 데카르트의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열 석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몹시 병약했기 때문에, 의사들조차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진단할 정도였다. 그러나 극진하게 돌봐준 유모 덕분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학문의 길에 들어선 뒤로 데카르트는 줄곧 숨어살면서,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 그가 파리 외곽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 집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조용하던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문인들이 몰려듦으로써, 시끄러운 토론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자 데카르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갔다. 당황한 아버지 친구는 그를 수소문하던 중, 우연히 데카르트의 몸종을 만나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달라고 하였다.

때는 아침 열 한 시쯤. 살그머니 문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데카르트는 창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는 몸을 반쯤 일으켜 작은 책상에 대고 무엇인가를 적고, 또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글을 쓰곤 하였다. 이러기를 약 30분쯤하고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더라는 것이다.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쓴 바이예는 철학과 수학에서 데카르트가 남긴 중요한 업적은 대부분 그의 아침 잠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네덜란드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연구에 몰두할 때였다. 그는 사람들과 만나는 기회를 최대한 줄이고, 하루에 열 시간씩 충분히 자면서 사색하고 글 쓰는 데만 열중하였다. 찾아오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 20년 동안 열세 번이나 집을 옮겼으며, 아주 친한 친구들 이외에는 주소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다. 주로 편지를 통하여 다른 과학자나 철학자와 토론을 하였는데, 1주일에 하루는 꼬박 편지를 썼다. 이때에도 신중을 기하기 위해, 가명(假名) 수신인 주소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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