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기묘한 행동(7)-완적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완적은 어려서부터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손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가 바둑을 두던 중 모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완적은 바둑 두기를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술을 잔뜩 들이키고는 큰소리로 울면서 붉은 피를 토해냈다고 한다. 또 상을 당했을 경우에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당시의 규범이었으나 완적은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친구인 배해가 조문을 왔을 때 일이다. 완적은 머리를 풀어헤치고서는 고주망태가 되어 침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이상한 눈빛으로 배해를 쳐다볼 뿐, 곡을 한다든가 슬픔을 표시하는 등 조문객에 대한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완적의 이런 모습을 본 배해는 하는 수 없이 혼자 땅에 돗자리를 깔고 곡을 한 다음 돌아갔다. 그 후 배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완적은 원래 유교의 예법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어서, 우리 같이 모든 것을 속세의 예법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서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네.”

또 완적은 사마소(중국 삼국시대의 위나라 명장이자 권신이었던 사마의의 아들, 진나라를 세웠던 사마염의 아비)가 있는 자리에서도 괘념치 않고 술을 마셔댔다. 이것을 보고 오늘날의 치안본부장 격인 하중이 분개하여, “명공(사마소)께서는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온데 완적은 거상 중인데도 명공의 자리에 나타나 술과 고기를 먹었습니다. 마땅히 그를 나라 밖으로 추방하여 풍속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마소는 완적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병중에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오.” 라고 하며, 그에 대한 탄핵을 묵살하였다.

완적은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에 속해있었다. 대나무 숲에서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던 이들은 술을 좋아하고, 음악을 즐기며, 노자 및 장자의 허무주의를 숭상하는 한편 유교의 예절을 멀리하였다. 여기에는 완적과 혜강, 왕융, 향수, 완함, 유영, 산도 등 일곱 사람이 속해 있었는데, 특히 완적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자연을 즐겼다. 어떤 때는 자기 집 뒤뜰의 대나무 숲에서 거문고를 타고 노느라, 잠자고 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던 중 사마소가 그의 아들 사마염(나중에 진나라의 왕이 되었음)을 완적의 딸에게 장가보내려 하였다. 이에 완적은 60일 동안 술에 취하여 사마소로 하여금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던 바, 술은 그에게 일종의 보호색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술은 결코 그의 맘속에 자리 잡은 고통까지 달래주지는 못했다. 그는 가끔 말을 타고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달려가서는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하니,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비극을 보고 광달파의 다른 사람들은 일부러 미쳐 날뛰며 세상을 멀리하였다. 유영(劉伶) 같은 사람은 술만 취하면 알몸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비웃으면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나무랐다. “나는 천지(天地)로써 방을 삼고, 방으로써 내의(內衣)를 삼는데, 당신네들은 어찌 나의 내의 속에 들어와 큰소리를 치는 거요?”

뒤이어 등장한 팔달파(八達派)의 방탕한 행위는 아예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예컨대, 광일이란 사람은 옷을 벗어 던지고 개집 속으로 기어 들어가 개처럼 크게 소리 질렀고, 사곤(謝鯤)은 이웃집 여자를 희롱하다가 그 여자에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이까지 부러졌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필탁(畢卓)은 이부랑(오늘날 차관급)의 벼슬에 있으면서도 술 취한 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 술을 훔쳐 먹다가 붙들리기도 하였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