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결코 순수하지 않았다

이연*/ 백수읍(평화확립상)

우리가 즐겨보는 드라마 속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나 왜곡된 시선은 흔히,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구시대의 봉건적 여성관은 고스란히 일일드라마와 일치되는 경향을 보인다.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 속의 주인공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여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울고 웃는 이야기를 재생산해내는 것이다.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외도와 선악구도가 분명할수록 드라마 속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은 강해서 드라마를 보면서도 저 쳐죽일 년이라든가 저 못된 년이라는 등등의 욕설을 서슴없이 퍼부어 대기도 한다. 드라마의 주 시청층이 여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들은 주로 못된 며느리를, 며느리들은 지독한 시어머니를 향해 자신의 경험과 입장을 표현하는 등 주로 여성에 대한 지탄이 대부분일 경우가 많다. 물론 바람둥이 남편이나 여자를 버린 남자들도 지탄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바람 피는 여성, 남의 남자를 가로챘다는 여성들에 대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인식의 사회적 축소판이기도 하지만 드라마를 통해 그 사회 가치관을 확고히 하고, 확대재생산 해낸다는 측면에서는 휠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소위 가족드라마라고 하는 일일 드라마를 안보는 편이고, 드라마를 화제로 나눌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모방송사의 도깨비라는 드라마를 즐겨보게 되었다. 드라마가 주는 소재의 신선함과 시·공간을 초월한 것(최근 드라마의 트랜드가 되기도 했다)에 대한 흥미와 평소 호감가지고 있던 남성배우에 대한 선호가 겹쳐서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어느 날 드라마에 빠져있는 나에게 남편이 툭 한마디 던졌다.

저거 너무 한 거 아닌가?”

뭐가?”

아무리 미화를 해도 남자와 여자가 나이차가 너무 심하지 않아? 그리고 여자는 아직 고등학생이고?”

순간 나는 머리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게 어때서? 사랑은 나이도 국경도 초월하는 거잖아?’라며 사랑이라고 하는 환상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꺼림직했다. 멋진 능력과 순수함을 지닌 남자 주인공, 순진하고 풋풋한 여주인공의 애절한 사랑에 빠져 있기만은 불편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드라마 보는 내내 외면했던 두 가지 사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첫 번째, 이 드라마도 전형적인 신델렐라 콤플렉스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죽고 이모네 집에 살면서 살림을 도맡아하며 학대를 당하는 여주인공(지은탁)이 돈 많은 재벌로 위장한 남주인공(도깨비, 김신)을 만나서 불행한 환경에서 벗어나는 구도를 보여준다. 도대체 주거지도 없이 알바생인 여주인공과 특정한 일도 하지 않음에도 그 크고 화려한 저택의 생활을 누리는 남주인공은 신분의 격차가 너무나도 큰 캐릭터들이지 않은가?

이 드라마는 신델렐라 콤플렉스에 거부감이 없도록 주인공 여자의 상황을 비참하게 그려냄으로써 저런 환경에서는 누구도 참고 살 수 없겠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비참한 환경을 벗어나게 할 구원의 힘을 필요로 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구원이란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에 기대고 싶다는 욕구와 그 기대 대상에 대한 전능한 힘을 부여하기 마련이다. 드라마에서는 그렇게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도깨비를 탄생시켰고, 그 도깨비에 대한 선망은 비련의 주인공으로 또 한 번 시청자의 감성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여성은 철저히 소외된다. 남자주인공에게 기대고 사랑을 받고자 애쓰는 존재로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남녀의 평등한 존재로서의 동등한 사랑은 설정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나이의 격차에 나타난여성의 성적 대상화문제이다.

남자의 나이는 30대 중반 쯤이고 여자는 여고3학년 수능입시생이다. 이들의 나이차는 10년은 훌쩍 넘는 나이고, 삼촌뻘인 나이차가 난다. 가상의 멋을 최대치로 끌어낸 남자 캐릭터역에 멋진 남자 배우를 내세워서 나이는 별문제 아니라는 듯이 문제를 희석화 시킨다. 사랑으로 미화시킨다. 물론 사랑에서 나이가 전적이지는 않다. 나또한 단순히 나이차가 많이 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상식적이지 않는 남녀의 나이 차이를 용납하는 그 기저에는 자본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여성을 성적대상화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남자주인공에게 툭하면 500만원을 달라고 하는 장면들은 마치 원조교제 같은 느낌마저 드는 것이 그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실제 도깨비의 나이는 939세라고 설정함으로써 현실적인 나이에 대한 통속을 벗어나고, 불멸의 삶을 끝내기위해서 신부가 필요하다는 줄거리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논란을 살짝 벗어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드는 의문이다. 왜 우리 사회는 어리고 순수한 여자,19세의 여자아이에 대한 로망을 생산해내고 있는가? 지고지순한 첫사랑의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어린 여자로 소비하려고 하는가?

나를 가장 불편하게 했던 2가지 요소에도 불구하고 왜 이드라마의 시청률은 높고, 드라마 속에 나왔던 시집은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드라마는 멋진 배우와 외적 장치들을 통한 흥미를 불러일으켜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잠시라도 현실을 잊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나의 지친 삶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서 환상의 세계로 빠지기엔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은 없을 것이다. 골치 아픈 정치, 경제, 뉴스가 홍수인 삶에서 드라마가 주는 환상처럼 달콤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현실이 될 수 없는 줄거리를 동경하는 동안에 우리의 눈높이는 그 드라마의 주인공의 삶과 화려한 자본의 유혹에 맞추어져 버리고, 드라마 속의 세상이 진실이 되는 가치관의 혼돈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은 더욱 척박하게 느껴질 수 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결여되고 결핍되어 있는 것 같고, 결핍은 무의식적으로 욕구와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드라마는 그래서 항상 요즘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광고 효과와 상품의 소비를 극대화 시킨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시는 제작사와 출판사가 사전에 간접광고(PPL)를 계약해서 나온 장면이었다. 그 시집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전에 없이 시집이 재출간되고, 출판시장은 자본과 다시 돈 많은 출판사에 의해 교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심각한 것은 상품과 자본의 대상이 사람에게까지 확대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반인권적인 요소들이 아무 문제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인식되어지고, 여성을 대상화 시키고 상품화 시켜 결국에 우리의 인식을 마비시킨다. 우리를 존재론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하고, 자본이 원하는 대로 드라마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드라마는 그 사회의 많은 의도성을 내포하고 있고, 그 어떤 드라마도 결코 단순하거나 순수하지 않다.

만약 유독 드라마에 빠져드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된다면 자신의 삶을 점검해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리라. ‘드라마 속의 환상으로 도피하는 나의 심리와 드라마가 주는 마약과 같은 즐거움. 중독으로 빠져드는 것은 무엇인지? 나의 삶에 만족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를 점검하는 동안 자신을 소외시키고, 여성을 소외시키고, 다른 사람과 세상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드라마의 재미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현실은 현재진행형이고, 우리의 현실은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도 발견할 것이다. 드라마는 환상일 뿐, 환상이 깨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이 글은 영광여성의 전화가 주최한 세계여성 폭력 추방 주간 맞이 글짓기공모전의 입상작품으로 실명과 사진은 글쓴이의 요청으로 인해 게재하지 않습니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