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기묘한 행동(9)-김시습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철학자들 가운데,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율곡 이이가 백세(百世)의 스승이라고 칭찬한 매월당 김시습은 스물한 살 때에 삼각산(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한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시내 나들이를 하고 온 사람이 수양대군(조선 제7대 왕 세조)이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김시습은 책을 덮고 문을 걸어 잠근 다음, 사흘 동안 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저녁, 갑자기 통곡을 하고는 읽던 책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이어 또 미친 척 하면서 측간(변소)에 들어가 있다가 절을 빠져나왔다. 이후 그는 유학자의 갓을 팽개치고 평생 벼슬과는 인연이 없이 살아갔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에 사육신(死六臣-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여섯 충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유응부 대신 김문기라는 설도 있음) 등이 참형되어 그 시체가 길거리에 버려져 있었으나, 누구 한 사람 거두어주지 않았다. 이때 어떤 중이 이들 시체를 거두어 노량진 길가 언덕에 묻었다고 하니, 이 중이 바로 김시습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 치고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괴상했다. 머리는 깎았으되 수염은 기르고 있었다. 김시습은 키가 작고 얼굴도 못생겼다. 여기에다 또 머리에는 중의 모자가 아닌 검은 벙거지(병졸이나 하인이 쓰던,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다녔으니, 기인(奇人)의 행색임이 분명했다.

김시습은 절간에서 음식을 얻어먹고 관가에 밥을 청하는가 하면, 여염집(일반 백성의 살림집)에서 잠자리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술에 취해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매화를 바라보기도 하고, 대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기도 했다. 울분을 토하듯 시를 토해냈는데, 그의 시 짓는 버릇이 또한 괴상했다. 서 있는 나무를 깎아 시를 써 놓고는, 한동안 읊고 나서 통곡을 하며 깎아버렸다. 또 종이에 시를 써서 한참 바라보다가 물에 던져버렸다. 그는 틈틈이 바닷가를 거닐기도 하고, 또 교외나 시전(市廛-장거리의 가게)에 나가 구경도 했다.

수양대군인 세조가 죽고 새 임금 성종이 즉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할 때, 김시습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한때 남소문동에 있는 이정은(태종의 손자)의 집을 거처로 삼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방안에 들어서니, 조우라는 중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이에 큰 소리로 조우는 노사신(세조의 총애를 받은 문신)에게 글을 배운 중놈이오. 이 자리에 낄 수 없는 자이오.”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조우는 앞으로 튀어나오며, “생원(生員-나이 많은 선비를 대접하는 뜻으로 부르는 말)이 감히 대재상 욕을 해도 되는가? 만일 나를 죽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보시오.”라고 외쳤다. 그러자 김시습은 조우의 목을 틀어쥐고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이때 옆 사람들이 모두 말리는 덕분에 조우는 겨우 몸을 빼서 도망칠 수 있었다.

김시습은 마흔 살이 훨씬 지난 후에도 서울거리를 종횡으로 휩쓸고 다녔다. 거리를 지나다가 색다른 것을 보면,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곤 했다. 이렇게 하다가도 소변이 마려우면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혹은 큰 거리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냅다 허리춤을 열고 갈겨댔다. 옷은 너덜거리고 패랭이(대오리를 걸어 만든 갓. 신분이 낮은 사람이 썼음)는 찌그러들고 새끼띠를 두르고 거리를 종횡하고 다니니, 아이들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거지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아이들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늙은 거지야!”라고 놀리며, 돌멩이나 깨진 기와 조각, 막대기를 던지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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