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기묘한 행동(11)-연암 박지원

몸이 약한 손자에게 글을 읽지 못하게 한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박지원(1737~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3년 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책을 읽었다. 그 덕분에 그는 스무 살에 이미 사회개혁의 창도자이자 저명한 문학가가 되어 있었다. 서른네 살에는 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나, 친구들의 권유에 못 이겨 응시한 회시(會試-과거의 초시 합격자가 제2차로 보는 시험)에서는 일부러 답안지를 내지 않고 나와 버렸다. 이때 박지원은 선비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금의 종로 네거리 부근의 장사치들, 막벌이꾼, 거지들에게까지 명성이 자자하여 때로는 그들의 스승으로, 때로는 벗으로 통하였다. 그 무렵, 집안 식구들을 경기도 광주로 내려 보내고 혼자 살고 있었던 박지원의 생활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사흘씩 밥을 굶기도 하고, 또 사흘씩 술을 마시는가 하면 낮잠만 자기도 하고 책만 읽기도 하고, 그러다가 주변의 문사(文士)들이 모여들면 시와 술로 흥을 돋우었다. 그리고 그들의 화제는 항상 현실의 모순과 비리를 개혁하는 데로 모아졌다.

그런데 그가 서울에 혼자 남은 것은 그의 몸이 뚱뚱하여 여름철 더위를 견디지 못했고, 또 시골에서는 모기와 개구리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다. 서울 집은 비록 좁긴 했으나 모기나 개구리가 없어 그런대로 견딜 만 했던 것이다.

그를 수발하고 있던 사람은 어느 계집종이었는데, 그 여종은 안질에 걸리자 주인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가버린 종을 찾을 생각조차 안했으니, 결국에는 밥지어줄 사람도 없었다. 이리하여 행랑아범(남의 집 대문간에 살며 잔심부름을 해주는 남자하인)에게 밥을 붙여먹었는데, 행랑아범은 그에게 농지거리를 하면서 거리낌 없이 대했고, 그 역시 천진하게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며칠씩 세수를 하지 않는가 하면 열흘씩 머리 손질도 하지 않으면서 더러 땔나무꾼이나 참외장수를 불러 담소를 즐길 뿐이었다. 그리고 다리 부러진 어린 까치에게 밥알을 던져주면서 장난을 치는 일에나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청나라에 다녀와 그 유명한 <열하일기>를 썼는데, 특히 여기에 담긴 <호질문><허생전>은 풍자문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호질문(虎叱文)의 내용을 간단히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한 마리 큰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의원을 해치자니 몸에 독약을 지녔을지 모르겠고, 무당을 잡아먹자니 불결한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깨끗하다는 유생을 선택했는데, 마침 도학으로 이름이 높은 북곽 선생이란 선비와 마주치게 됐다. 그런데 마침 그는 정을 통해 오던 과부의 아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허겁지겁 도망을 치는 중이었다. 더욱이 칠흑 같은 밤인지라, 발을 잘못 디뎌 분뇨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똥통에서 허우덕거리다가 머리만 내밀고 나오려는데, 큰 오랑이가 버티고 앉아 있지 않은가? 질겁하여 자신의 죄상을 고백하며 살려달라고 빌자, 호랑이가 큰 소리로 꾸짖는다. “네 이놈, 네 말과 행실이 네 몸에 묻은 똥보다 더러워, 네 고기는 먹기 싫다.” 꾸지람이 끝나고 똥통에서 빠져나와 보니, 호랑이는 온데간데없고 아침에 들에 나가던 농부들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에 또 엉뚱한 소리를 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는 것. 박지원이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은 당시 유생들의 부패상을 꼬집어 풍자한 게 바로 호질문인 것이다.

문제는 지금도 이 호랑이의 꾸지람을 들을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오늘날 정계, 경제계, 종교계, 학계, 관계(官界), 법조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 호랑이의 꾸중을 들을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비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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