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이중성(1)-데카르트와 칸트 외

사람에겐 누구나 이중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들 역시 간혹 앞뒤가 맞지 않는행동을 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 첫 번째 예는 이미 여러 차례 살펴본 루소(프랑스)를 들 수 있다. 뛰어난 교육사상가로 널리 알려진 루소는 13년이나 연상인 드 바렝 부인을 만나 동거생활을 하였고, 그녀가 떠나간 후 매춘부와 난잡스런 관계를 맺었으며, 순박한 하녀를 만나서는 23년간의 동거 끝에 결혼한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다섯 명의 아이들은 모두 고아원에 보내버린다. 이유는 시끄러운 데다, 양육비가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근세철학자 데카르트는 어렸을 적 몸이 약해 늘 침대에 누워 생활했다. 그런 그가 동부 유럽을 한 바퀴 돌아 조국으로 돌아오던 중, 배 한 척을 세내었다. 이때 야비한 뱃사람들이 그의 돈을 빼앗으려 하자, 칼을 쭉 빼어들고 용감무쌍하게 대처하였다. 그러나 이 용기 있는 데카르트가 너무나 유약(柔弱))하게 처신한 경우가 있었다. , 그는 1632년 중세 과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세계>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하지만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이탈리아의 물리학자)가 종교재판으로 파문(破門-교회에서 추방하고, 징벌을 과하는 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개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데카르트는 지동설을 주장하였기에 교회 당국과 마찰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해하는 중에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조용하게 사는 것뿐이네. 세상은 나의 작품을 내가 죽은 뒤 100년이 지나서야 보게 될 것이야.” 이 편지를 받은 친구는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낸다. “자네의 책이 좀 더 일찍 읽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철학자 하나(데카르트)를 죽이는 것 밖에 도리가 없겠네.” 아마 데카르트의 처신이 맘에 들지 않아서였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결국 이 책은 그 일부 내용이 <철학원리>에 포함되어 있을 뿐, 출판되지도 않고 지금 전해지지도 않는다.

노인이 된 칸트의 생활은 아주 평온하게 진행되어 나갔다. 단 하나의 사건, 프로이센(지금의 독일) 교육부 장관과의 알력을 제외하고는. 이 장관은 칸트가 종교에 대해 너무 합리적인 태도로 서술했다고 화를 낸 적이 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왜곡하거나 등한히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스스로의 입장을 굽힌다. “만일 어떤 사람의 말이 모두 참이라 할지라도, 모든 진리를 공공연하게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함께 그는 앞으로 어떤 강연이나 논문을 통해서도 종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 국왕(“짐은 국가 제 1의 종이다라는 말로 유명)이 죽고 난 후에, 그는 저서 <학부의 논쟁>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자기의 소신을 뚜렷이 밝혔다.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 헤겔은 젊은 시절부터 노인으로 불리었다. 또한 그의 강의는 깊고 오묘하긴 하였으나 대부분 눌변(더듬거리는 서툰 말솜씨)으로 진행되었으며, 그의 사유 또한 무겁고도 끈질긴 것이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그의 성격은 들으나마나 조용하고 엄숙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황급하고 때로는 괴팍하기도 하다고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헤겔은 평소 매우 무뚝뚝하고 과묵하였지만, 일단 화가 나면 상대방이 온몸을 떨어야 할 정도로 격정적인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가 일단 증오하기로 작정하면, 철저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의 질책(叱責-꾸짖으며 나무람) 또한 대단히 매서웠다. 그에게 당하는 사람은 사지를 바들바들 떨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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