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희/ 영광문화원 부원장

유호가 작사를 했고 박시춘이 작곡을 했으며 가수 현인이 부른 전우야 잘가라는 이곡은 낙동강 총 반격 작전 때 나온 전쟁 대중가요다. 지금으로부터 67년전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우리 국군은 36일 만에 낙동강까지 후퇴를 했고 여기서 무려 45일간을 버티면서 반격작전의 전투계획을 구상한다.

이때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915일을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 디데이(D-day)로 극비리에 정함과 동시에 5천분1 성공가능성에도 전략적인 결단을 했고 그 결과 국군과 유엔군은 총력을 다해 진격한다. 육중한 군화 발자국과 진한 화약 냄새를 뒤로하면서 총탄에 쓰러진 전우의 명복과 영면을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북진을 계속했다.

무엇보다 북한군의 남침 3일차, 628일 한강철교를 예고없이 폭파한 정부는 임시수도를 77일 대전, 716일 대구, 818일 부산으로 이전한다. 하지만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은 3개월여만에 수복(收復)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928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이튿날 정오에 감격적인 서울수복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어 101일 백골사단이 동해안 하조 대지역에서 강력히 저항하던 북한군 대대를 사정없이 격파하면서 38도선을 어렵게 돌파한다. 이 때 정일권 육참모총장의 무전명령을 받은 국군 3사단 23연대 장병들의 용맹스런 진군, 결국 1950101일에 국군이 38도선을 최초로 통과하면서 북진한 날을 기념하는 의미로 1956년에 10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한 것이다.

이처럼 총탄과 포탄의 여운이 감돌던 날 서울에서 숨죽이고 있던 유호(본명 유해준)는 죽을 고비를 무난히 넘겼다는 안도감에 명동을 거닐다가 우연히 벙거지를 눌러쓴 박시춘을 만난다.

그날 둘은 전쟁통에 모처럼 만난데다 쌓인 회포도 풀겸 밤늦게 까지 술독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시내 중구 필동 박시춘의 집까지 걸어간 둘은 술이 취한 감성으로 전쟁 상황을 주고받는다.

이때 박시춘은 기타로 가락을 퉁기고 유호는 오선지에 가사를 적어 넣는다. 최후 방어선 낙동강을 1, 북진 중간행로 추풍령을 2, 노들섬 한강수를 3, 원한의 38선을 4절로, 이 노래가 설흔세살이던 현인의 입을 통해서 전장에 울려 퍼졌고 참전용사들의 둘도없는 애창곡이 된 것은 물론, 많은 국민들 사이에서 전후 힘겹고 허탈한 마음을 달래는 전쟁 대중가요가 되었다.

특히 이 노래는 1·4후퇴 후에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야라는 구절이 불길한 내용이라고 금지됐다가 1952년말 해금이 돼서 6·25 전쟁 참전 용사들의 절대 애창곡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더욱이 유호1921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고 1939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가수 현인보다 1년뒤에 졸업한 것도 사실이며 본명 해준이란 이름도 출생지 해주의 첫글자에서 따온 것 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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