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희/ 영광문화원 부원장

그동안 우리가 그 시절 그 노래, 그리고 그 사연에 얽힌 추억을 더듬어 보면 신세영이 부른 전선야곡6.25 전쟁 중 2년여에 걸쳐 진행된 정전협정이 낳은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195178일부터 1953727일까지 749일동안의 어렵고 지루한 협정, 1,129일간의 전쟁중 당국은 3분의 2를 협상테이블에 앉아서 실랑이만 했고 전투임무를 수행하던 장병들은 한치의 땅이라도 더 사수하기 위해 전장에서 목숨을 걸었다.

무엇보다 목숨을 내놓고 발버둥치던 고지전투, 전선의 밤은 삼엄했고 이때 보초를 서던 전우들은 찬 이슬, 비바람을 견디며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1951년 휴전협정이 한창이던 그 무렵 밤과 낮의 주인이 바뀌던 치열한 공방전의 상황을 유호가 노랫말을 쓰고 박시춘이 멜로디를 붙여서 가수 신세영이 불렀으며 그 후 전군의 불멸의 보초가가 된 이 노래는 ――가랑잎에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 그 목소리 그리워--------- (1)

허기야 1951년 대구에 잠시 머물던 박시춘은 전선야곡을 제목으로 정하고 가수 남인수를 생각하며 유호에게 가사를 부탁한다. 그리고 스스로 구성지고 구슬픈 전장가락(戰場歌樂)의 멜로디를 입힌다. 이때 오리엔트레코드사 이병주사장이 박시춘에게 신세영(본명 정정수)을 추천했다. 결국 이 노래는 남인수 대신 신세영의 절창으로 세상에 울려퍼진다. 당시 25세이던 신세영은 1926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을 했다. 그는 해방직전 일본군에 징집돼 만주전선에 투입되었고 그때 B29의 폭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일제가 패망한 후에 귀국을 했다.

더욱이 1947년 오리엔트레코드사 콩쿠르에서 입상한 신세영은 그 뒤 이 회사 전속가수가 되었다. 특히 신세영이란 예명은 당시 유명가수였던 신카나리아, 장세정, 이난영의 이름중에서 신··영 한자씩을 따서 붙힌 이름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1948로맨스항로로 이미 데뷔한바 있으며 특히 해방이후 현인에 이어 두 번째로 등록한 대중가수가 되었다.

아울러 1951년 신세영이 전선야곡을 받아 취입하던날 얄궂게도 그의 어머니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민족 애환기에 노래를 통해 민초들의 애달픔을 달래준 예인의 별이었다. 또한 그는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044월에 영구 귀국을 해서 생활하다가 20108월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2010년에는 연예계의 큰 별이 많이 진 한해였다. 코메디계의 거목 배삼용, 원로 작곡가 박춘식, 원멘쇼계의 대가 백남봉, 여가수 백설희등을 들수 있으며 특히 신세영은 가수 태일(본명 정태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한편 작곡가 박시춘의 본명은 박순동 이었는데 시춘(是春)언제나 봄날말하자면 늘봄이라는 의미로, 서울 아리랑가무단의 연출가였던 홍개명(후일 영화감독으로 활동)이 직접 지어진 예명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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