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2)-자연사(칸트)

칸트(1724~1804, 독일)는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또 그 후로 기나긴 시간강사 시절 동안에도 생활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젊은 시절 수입이 너무 적어 끼니를 거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에도 병이 생길 경우를 대비하여 매달 일정한 돈을 저축해놓고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으며, 오히려 빚 놀이를 하여 돈을 모아 나갔다. 이처럼 검소한 생활 덕택에 나이가 들어서는 풍족하게 살 수 있었으며, 죽은 후에는 제법 많은 유산을 남겼다. 물론 빚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칸트가 구두쇠였던 것은 아니다. 친척이나 하인, 생계가 곤란한 이웃사람들에게는 현금을 지불하며 적극 도왔다. 칸트는 예순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낡은 집을 하나 샀는데, 방안에는 책상과 책꽂이 이외에 책장 두 개가 있었고, 벽에는 루소의 초상화 한 장이 걸려 있었을 뿐이다.

1796, 72세가 된 칸트는 여름 강의를 중단하기에 이른다. 세월이 지나자 뛰어난 기억력마저 급속하게 쇠퇴하여, 책상 위에 비망록(備忘錄)이 없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제자인 바지안스키 목사는 78세가 된 칸트에게 운동하길 권했다. 그러나 노철학자는 정원의 아름다운 경치도 물리친 채, 오직 방안에 있는 자기 자리만을 원했다. 칸트를 숭배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왔지만, 칸트는 그 누구와도 만나길 원치 않았다.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칸트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넘어져 의식불명이 되었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회복은 되었지만, 1803(79) 말이 되자 눈도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모든 위임장에 겨우 서명만 하고, 나머지 일은 모두 제자인 바지안스키에게 맡겼다. 18042. 칸트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25, 의사가 왔다. 칸트는 온힘을 다해 의자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의사가 앉으라 권하여도 앉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사가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에 앉았다.

211, 칸트는 핏기 없는 입술을 시중하는 바지안스키 쪽으로 돌려 오랫동안의 호의에 감사하는 이별의 키스를 하려 했다. 입에 떠 넣어진 수프가 골골 소리를 내며, 목을 타고 내려갔다. 마침내 1804212일 새벽 1시 무렵, 물에 탄 포도주로 입술을 적신 칸트는 가느다란, 그러나 알아들을 수 있게 “Es ist gut!(이것이 좋다. 혹은 여한이 없다)”는 한 마디를 남겼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다음날인 12일 오전 11시 무렵, 대철학자의 정신을 80년 동안 지탱해준 육체라는 기계는 그 운전을 정지시켰다. 제자 바지안스키와 여동생 카타리나, 조카, 하인,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칸트의 죽음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칸트는 조촐하고도 소박한 매장을 원했다. 하지만 실제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시내에 있는 모든 교회의 종에서 조종(弔鐘)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수천 명의 행렬이 운구 뒤를 따랐다. 시신은 그가 평생 근무했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캠퍼스 안 묘지에 안치되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선배들 사이에 끼여 있던 칸트의 묘는 가끔 그 장소를 옮기곤 했는데, 지금의 묘에는 <실천 이성 비판>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그 유명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탄과 외경(畏敬)을 내 마음 속에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머리 위에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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