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3)-자연사(볼테르, 흄, 벤담)

언제 어디서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는지조차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프랑스의 볼테르(1694~1778, 철학자, 역사가, 문학자, 계몽주의 운동의 선구자)는 평생 교회와 성직자, 권력자들과 싸웠다. 이것은 거리낌 없이 조소를 퍼붓는 그의 독설과 관련이 있거니와, 이는 그 삶 자체의 혼란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때문에 한 밤 중에 습격을 받아 얻어맞기도 하고 바스티유 감옥(루이 14세 때 정치범을 가두었던 감옥, 과거 프랑스 전제 정치를 상징하는 건물)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국 체류생활이 그의 삶을 바꾸어놓고 말았다.

, 영국인이 누리는 자유와 고국 프랑스의 지배체제를 신랄하게 비교한 볼테르의 <영국인에 관한 서한>은 고국의 동포들에게 마치 혁명의 불길을 당기는 화약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83세의 볼테르가 파리로 귀환할 때의 광경은 마치 개선장군의 행차처럼 보였다. 이와 같은 개선의 기쁨을 맛보면서, 그는 바로 혁명 직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비에는 인간의 정신에 강한 자극을 주고, 우리들을 위해 자유를 준비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영국의 회의주의 철학자 흄(1711~ 1776)은 홀어머니 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대학에 들어갔다가 졸업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스물여덟 살에 출판한 <인성론>은 사람들로부터 이렇다 할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 도서관의 사서직(문헌을 수집·정리·보관하고 대출과 이에 필요한 정보를 서비스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집필한 <영국사>는 그에게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가져다주었다. 이때부터 흄은 왕성한 사회활동에 빠져든다. 1년 동안 외무부 차관직을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흄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자 죽음을 예감하고, <나의 생애>라는 짤막한 자서전을 썼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의 성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온화하고 쾌활한 성격에 자제심이 많았을 뿐 아니라, 허심탄회하고 사교적이었다. 남에게 적개심을 품어본 적이 없으며, 심지어 문필가의 명성을 얻지 못할 때조차 그러한 나의 기질을 잃어본 적이 없다.”

물론 이러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다를 수 있겠다. 하지만 1776년 흄은 그의 친구 아담 스미스(영국의 정치 경제학자, 도덕철학자, 고전경제학의 창시자)가 회고하듯이 완전한 정신의 평온 속에서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종의 순간에도 회의주의(懷疑主義-인간의 지적인 능력으로는 확실한 지식이나 객관적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버리라는 그 모든 권유를 완강히 거부하였다고 한다.

소년시절부터 마음이 약한 아이였고 몸도 허약한 데다 감수성이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 벤담(1748-1832, 영국의 정치사상가, 공리주의 철학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 타고난 천성이 잔인하지 못했던 그는 공리주의 철학을 완성하였고, 한때는 정치에도 몸을 담았다. 민주주의 사상을 전개한 최대의 저작 <헌법론>이 완성되자 더욱 유명해졌고, 이때부터 그를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졌다. 비서인 보링에게 어린 시절부터의 추억담을 정리하게 한 벤담은 183266, 마침내 보링에게 안긴 채 자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의회개혁 운동이 주효하여 선거법 개정안이 이틀 전에 의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이미 들었던 그의 얼굴에는 만족한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그의 시체는 유언에 따라,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해부 실습용으로 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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