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4)-자연사(야스퍼스, 하이데거)

어렸을 적 몸이 약했지만 학교에서 저항정신을 폭발시키기도 했던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1883~1969)는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죽고자 하는 마음을 여러 차례 가졌던 것 같다. 그 첫 번째는 1933년 정권을 잡은 나치가 유태인 아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박해를 가할 때였다. 철학과 주임교수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행정에 관한 모든 권한이 박탈되었다. 사방에서 그에게 이혼을 권고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야스퍼스는 대학교수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1937년 여름학기가 끝나기 직전에 대학으로부터 휴직을 통보 받은 것이다. 이 무렵 독일의 모든 대학에서는 유태인과 결혼한 교수들이 면직되었다. 이때 그는 외국으로 망명하든지, 아니면 국내에서 강제이혼을 당하든지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이혼을 하지 않은 채 국내에 머물기로 맘먹는다. 이때부터 죽음을 각오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친구인 의사 불쓰로부터 치명적인 독약 청산가리를 얻어 낮에는 선반에, 저녁에는 머리맡에 두었다. 유언장도 미리 작성해두었다. 생사가 걸린 위기상황에서, 야스퍼스는 혹시 내가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면, 부디 아내와 함께 묻어 달라.”는 당부를 남겼다고 한다.

그 후 생활물자의 배급이 정지되고 주택이 몰수되는가 하면 생명마저 위협받게 되자, 야스퍼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 나치가 멸망하고 야스퍼스가 다시 대학에서 주도권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 야스퍼스가 당시까지 거주권을 가지고 있었던 하이델베르크에 머무는 것을 포기하고 스위스 시민권을 갖게 된 것은 19676월말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26개월 후, 그는 86세를 일기로 빛나는 생을 마감하였다. 인생의 힘들고 어려운 때를 잘 견디어 마침내 승리한 경우라 해야 할 것이다.

야스퍼스와 더불어 독일 실존주의의 쌍벽을 이루는 하이데거(1889~1976)는 나치 정권 치하에서 있었던 대학총장 취임으로 인하여 학문적 권위와 명예에 지울 수 없는 티를 남기게 된다.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그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던 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에 대해 시실리 섬의 독재자, 디오니소스의 스승이 되었던 플라톤의 과오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평하였다. 어느 날, 69세가 된 그녀는 병상에 누워있는 하이데거 곁으로 다가간다. 25년 만에 본 스승의 얼굴은 무척이나 늙어 있었고, 게다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애제자이자 사랑하는 여인을 끝내 알아보지 못했다. 한나는 그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한다. “당신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날처럼,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도 알고 있죠? 신의 뜻대로, 나는 죽고 난 뒤에 당신을 더욱 더 사랑할 거예요.” 한나는 그로부터 4개월 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1년 뒤,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말년의 하이데거는 자신의 산장에 은둔하면서 구름과 숲을 벗 삼아 고도로 집중적인 지적(知的)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 완성된 그의 저작이나 강연들은 너무나 함축적이고 시적(詩的) 비유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거장의 철학자에 대해 흔히 그렇듯이,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두 갈래로 나뉜다. 그의 추종자들은󰡒그의 업적이야말로 2천 년 철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말한다. 반면 반대편의 사람들은󰡒불가해한 오솔길에 스스로를 숨기고 있는 하이데거는 진지한 토론의 여지조차 마련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보다 더 정당한 평가인지는 속단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전 세계를 통하여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 가운데 하나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