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 강항선생 학술세미나가 인문학적 관점의 정유재란 포로 수은 강항에 대한주제의 내용으로 무라까미 쓰네오 수은강항선생 일본연구회장의 나의 수은 강항선생 연구의 발자취와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의 수은 강항선생과 영광군 발전방안’, 김덕진 광주교대 사회학교수의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수은 강항의 역할과 위상등의 발표가 열린다. 영광신문은 강원구 회장의 주제발표 전문을 3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수은 강항선생과 영광군 발전방안<>

강원구 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 내산서원

서원(書院)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된 것은 송()나라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주자(朱子)선생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면서부터 서원으로 기능을 할 수 있었으며, (()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선생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嚆矢)이다.

조선(朝鮮)의 서원은 그 성립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기능과 성격 등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중국의 서원이 인재 양성을 위한 준비기구로서의 학교의 성격을 고수하였지만, 우리나라는 교육과 문묘종사(文廟從祀)에 두고 있었다.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은 크게 선현(先賢)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講堂), 원생(院生) 등이 숙식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이 외에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책을 보관하는 서고(書庫), 제사에 필요한 제기고(祭器庫), 서원의 관리와 식사준비 등을 담당하는 고사(庫舍), 시문을 짓고 대담을 하는 누각(樓閣) 등이 있다.

내산서원은 수은 강항(姜沆)선생을 모신 곳으로 교육기관인 서원과 제사기관인 용계사(龍溪祠)로 되어 있다. 강항선생은 영광군이나 전라남도의 인물이 아니라, 한국을 빛내는 거국적인 인물이며, 일본에 주자학을 전수하여 한국과 일본간의 교류하는데 중요한 인물이며, 역사적인 장소이다.

내산서원을 성역화한다는 것은 강항선생을 잘 모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청소년 교육기관으로 활용할 수 있고, 한일우호교류를 위한 주요한 곳이다. 또한 이곳을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영광군에 관광객을 유치하여 영광군을 발전시키자는데 목적을 둔다.

 

1. 간양록

간양록은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선생이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가 일본에서 포로생활의 경험과 현지 사정을 기록한 책으로 기간은 15979월에서 16005월까지 약 28개월이다.

그는 정유재란 때 이광정(李光庭: 호조판서, 청백리)의 종사관으로 남원(南原)에서 군량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읍성이 함락된 뒤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 형조참판 엮임, 김삿갓(金炳淵9대조)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영광군 인근 지역 또한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가족을 데리고 바닷길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적선을 만나게 되었고, 같이 가던 형제자매들이 바닷물에 뛰어들었으나, 일본군이 끌어 올려 포로가 되어 가게 되었다.

그의 부친이 탄 선박과 멀어지게 되어, 형제와 가족은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어 아버지와 슬픈 이별을 맛보았다. 이송되던 중에 배 위에서 심한 갈증에 시달리던 어린 조카의 죽음을 목격하였으며, 왜군은 이미 영광군을 불 지르고 산과 바다를 샅샅이 뒤져 사람들을 마구 찔러 죽인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920일 해상의 왜선 1천여 척이 이미 우수영에 당도했으므로 통제사는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전략상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923일 대낮에 당두에서 또 다시 논잠포로 향했으나, 아버지께서 행여나 그곳에 계신가 였다. 이때 안개 속에서 괴이한 배 한 척이 문득 나타나 쏜살같이 달려오니, 사공이 놀라 왜선이라고 외쳤다. 그는 순간 포로가 될 위기를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해 이내 옷을 벗고 물속에 몸을 던졌다.

처자, 형제 등 배의 남녀 태반이 그를 따라 함께 물에 투신했으나, 물이 얕아 적이 모두 건져내어 배에 눕히고 꽁꽁 동여 세웠다.

, ‘왜적들은 어린아이들은 거느적 거린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갓 돌이 지난 그의 사내아이 이를 영광 앞바다에, 6세의 딸 애생이를 순천 앞바다에 물건 버리듯 던져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강항선생은 정유재란으로 인해 아이들 뿐 아니라, 식솔들까지 갖은 고통에 치욕스런 삶이 매일 같이 반복되자, 그는 부끄럽게 사느니 선비답게 먼저 죽기를 각오하고 장인의 도움으로 동아줄을 풀고 나서 다시 바다에 투신했다.

하지만 그가 조선 선비라는 것을 알아차린 왜적 장수가 홍어잡이용 갈고리로 그의 왼쪽 얼굴 부위를 찍어 피로 물들인 배에 올린 다음 오리려 굵은 밧줄로 뱃머리에 더 꽁꽁 믂어 버렸다.

924일 무안의 한 해안가에 당도하니 왜선 수천 척이 항구에 가득차서 붉은 기와 흰 기가 햇빛 아래 비치고, 우리나라 남녀가 반 수 이상 뒤섞여 있다. 양 옆에는 어지러이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울음소리는 하늘에 사무쳐 파도와 같이 출렁이는 것 같았다.

둘째 형님의 아들 가련(可憐)은 나이가 여덟 살인데, 주리고 목말라서 짠 물을 마신 까닭으로 구토 설사하여 병이 나자, 적이 물속에 던지니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래도록 끊어지지 아니했다.

강항선생이 정유재란 때 붙잡혀 가면서 바다에서 저녁에 여인들의 울부짖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가 왜군에 붙잡혀 가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왜선 한 척이 옆을 스쳐 가는데, 어떤 여자가 급히 영광사람, 영광사람, 어디 없소?”하고 부르므로, 둘째 형수가 나가 물으니, 바로 애생(愛生)의 어미였다.

배를 따로 탄 이후로 벌써 귀신이 되었으리라고들 말하였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았다. 그녀가 천만 가지로 슬피 하소연하는 것을 귀로는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그가 남긴 한시(漢詩) 몇 수를 소개하고자 한다.

 

楚臣淚

何處竹枝詞 三更月白時

隣船皆下淚 最濕楚臣衣

어디에서 임을 찾아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달 밝은 삼경(三更)인데 잠을 이룰 수 없네.

이웃 뱃속의 포로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니

눈물이 모조리 내(楚臣) 옷에 적시는구나.

竹枝詞: 당나라 유우석(劉禹錫)이 지은 시로 남녀간의 그리워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

楚臣: 초나라 신하 종의(鍾儀)가 진나라에 잡혀가 초나라 옷을 입고 오직 조국만 생각하고 살았던 고사(故事)

 

相思恨

滄海茫茫月欲沈 淚和涼露濕羅襟

盈盈一水相思恨 牛女應知此夜心

푸른 바다 저 멀리 아득히 달이 지려는데,

눈물이 차디찬 이슬로 변하여 내 옷깃에 적시네.

글썽글썽한 한 줄기 눈물은 님을 그리워하는 이니

우리(牽牛織女)가 오늘밤 이 괴로운 심정을 알리라.

 

盈盈: 글썽 글썽한 눈물

牛女: 牽牛織女

金山 出石寺

錦帳名郞落海東 絶程千里信便風

鳳城消息鯨濤外 鶴髮儀形蝶夢中

兩眼却慙同日月 一心猶記舊鴛鴻

江南芳草群鶯亂 倘有飛艎反寓公

 

비단 옷을 입고 잘 지내던 내가 일본 땅에 붙잡혀 왔으니,

천리나 떨어진 고향에 편지를 마음 바람 속으로만 보내네.

임금님 소식은 고래 등 같은 파도 저 머나먼 곳에 있고,

아버님 모습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만날 뿐이네.

해와 달 같은 두 눈이 고향을 보지 못해 오히려 부끄럽고

마음엔 아직도 어릴 적 화목하게 뛰놀던 때를 생각하네.

내가 살던 강남땅은 꽃이 우거져 꾀꼬리가 날아다니는데,

만일 날아다니는 배만 있다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海東: 일본

鳳城: 임금님이 사는 곳

鶴髮: 아버님 모습

蝶夢: 꿈속에 나비가 되어 만나는 蝴蝶夢

舊鴛鴻: 어릴 적 화목하게 뛰놀던 때

寓公: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에 붙잡혀 온 군주

 

강항선생은 일본 도착 후 대진성(大津城: 오쓰성)에 갇혀 있다가 대판(大阪: 오사카)를 거쳐 경도(京都: 교토) 복견성(伏見城: 후시미성)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승려이자 학자인 등원성와(藤原惺窩: 후지하라 세이카)와 교유했으며,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일본어로 번역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등 일본 주자학 발전에 기여했다. 훗날 일본 주자학의 태두(泰斗)가 되는 등원성화는 강항으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강항은 4년의 포로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의 정세와 사회상을 습득하고 정리하여 본국에 알렸다. 그는 복견성에 억류되어 있을 때부터 현지의 관호(官號)와 형세(形勢) 등을 적어 인편으로 한양(漢陽)에 보내고 있었다.

특히 학식이 높은 승려 호인(好仁: 요시호토)과 친교를 맺고 그에게 유학을 가르쳐 주는 한편 그에게서 들은 현지의 지리, 군사시설, 관제를 비롯한 정세와 정황을 비밀리에 인편으로 고국에 보고했다.

1600년 강항은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하여, 적지에서 지켰던 절의와 그가 보낸 일본 관련 자료의 의미를 평가한 조정은 1602년에 그를 대구교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강항선생은 포로의 신세가 되어 죽음으로 절의를 지키지 목한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얼마 후에 사임했고, 1608년에 순천교수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서 독서와 후학(後學) 양성에 힘썼다.

강항선생은 포로 시절에 보고 들은 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을 건거록(巾車錄)이라 했다. ‘건거(巾車)’란 죄인이 타는 수레라는 뜻으로 포로가 된 자신은 죄인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책은 일본 현지의 정세를 적어 고국에 있는 임금에게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疎)를 세 본 작성했다.

하나는 1598년 이예주(伊豫州: 이요주)에 있을 때 김석복을 통해 보낸 것이고, 하나는 1599년 복견성에 있을 때 중국인 왕건공(王建功)을 통해 보낸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같은 것을 다시 써서 신정남을 통해 보낸 것이다.

이 중 선조(宣祖)에게 전달된 것은 왕건공을 통해 보낸 것이다. 왕건공은 원본을 자신이 갖고 필사본은 다른 중국인을 통해 조선 조정에 보냈다.

일본의 관직, 지도, 장수들의 특징 등을 기록한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 귀국 후 조정에 올린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일본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 귀환할 때 현지에 남아 있는 포로들에게 준 격문(檄文)인 고부인격(告俘人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항선생 사거 후에 그의 제자 윤순거가 1654년에 편집하여 1656년에 발간할 때 책의 제목을 간양록(看羊錄)’으로 고쳤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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