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6)-자연사(석가모니)

불교의 교조인 석가세존(釋迦世尊, 기원전 566~486)은 석가모니 또는 구담불타라고도 불리었다. 석가는 그가 속한 종족인 사키야(Sakya)의 이름이고, 모니는 성자(聖者)라는 뜻이며, 구담은 그의 성씨인 고오타마(Gautama)에서 따왔으며 싯다르타(Siddhartta)는 어렸을 때의 이름이다. 이밖에 그를 높여 부르는 이름으로는 아라한, 명행족, 여래, 불타, 세존 등 십여 개에 이른다.

석가는 지금의 네팔에 해당하는 카필라에서 성주(城主)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지 불과 7일 만에 어머니인 마야 왕비가 죽고 말았기 때문에, 이모의 손에서 자라나야 했다. 그는 예약된 성주의 자리를 뿌리치고 출가를 감행하여 히말라야 산 속에서 6년 동안 고행에 정진하였다. 그럼에도 끝내 만족을 얻지 못한 그는 고통과 즐거움 모두를 물리치는 좌사(坐思)의 묘리를 깨달아, 가부좌를 틀고 수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도를 깨달아 부처(붓다:覺者-깨달은 자)가 되었는데, 그 장소는 갠지스 강의 작은 지류인 네아란자라의 근처에 서있는 한그루 보리수나무 아래였다.

이때부터 그는 모든 지혜를 성취하여 온갖 번뇌를 벗어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열반에 이르러 해탈함으로써 여래(如來), 세존(世尊)이 된 것이다. 세존이 된 다음 그는 옛날에 고행을 같이한 바 있는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최초로 선교를 하였으니, 그 장소는 녹야원이며 이 사실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부른다. 교화 활동 5년째에는 베사리 성에 가서 이모이자 계모이기도 한 마하파사파제와 자기의 아내였던 야수다라를 제자로 만드니, 여성수행자 비구니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비구(여성 불교도)와 비구니(출가한 여자 승려), 우파새(남성 불교도)와 우파니(출가한 남자 승려)라고 부르는 남녀불교도 네 종류의 완비를 보게 된 것이다.

그의 죽음은 어느 금속 세공인의 집에서 정오 무렵, 식사를 한 후부터 찾아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허리에 통증을 느낀 석존은 구시나라 성의 사라 수풀에 들어가 밤중에 조용히 여든 살의 인생을 마쳤던 것이다. 그가 죽기 직전 200살을 먹은 최고의 장수자 수발타라가 급히 찾아와 불교의 법에 귀의하니, 그가 석존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그가 입적(入寂-중의 죽음. 열반, 입멸)할 때에는 하늘에서 꽃다발이 쏟아져 내리면서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다.

그만! 이제 되었다. 아난다야,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아라. 한번 태어난 인생이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난다야,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쉬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라.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갈 뿐이다. 제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해탈하도록 하여라.”

입멸 후 7일 만에 그의 유해는 수제자 마하가섭의 주재로 구시나라성 밖에서 화장되었고, 여덟 종족의 왕들에게 나누어 봉안토록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로 추측되는 것이 1898년 네팔 남방국경 피프라바에 있는 큰 탑파(塔婆-탑으로 된 묘. 불교에서 탑은 위대한 자의 정신을 한데 모아 신앙의 표적을 마련한 정신적인 장소로 여겨짐)에서 영국의 W. G. Peppe에 의해 발굴되었고, 현재는 이것이 인도와 영국의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부처가 열반에 든 후, 84두의 사리(舍利-부처나 성자의 유골. 나중에는 화장한 뒤에 나오는 작은 구슬 모양으로 된 것만을 가리킴)가 나왔으며, 이것으로 세계 곳곳에 84천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생애와 관련된 네 군데의 성스러운 곳으로 흔히들 그가 태어난 카필라국의 룸비니와 큰 깨달음을 얻은 마가다국의 부다가야, 최초로 설법을 전한 녹야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반에 든 구시나라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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