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희/ 홍농읍지 편찬위원장

그 시절 그 노래, 거기에 엃힌 사연을 조용한 가운데 들추어보면 김태희의 소양강처녀는 사실상 소양강 뱃사공 딸의 이야기다. 여기에서 처녀는 사공이 아니라 가수를 비유적으로 지칭한 것이다. 어쩌면 1968년 강원도 춘천출신 18세의 가수 지망생 윤기순, 그녀의 아버지는 6.25 전쟁때 한쪽 다리를 다친 어부였다. 그는 소양강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가족을 부양해 왔는데 그처럼 고생스럽게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맏딸 기순은 아버지를 도와야겠다는 일념으로 특별한 계획도 없이 경춘선 기차를 타고 상경을 한다

막상 서울에서 우여곡절 끝에 그녀가 찾아간 곳은 서울 가요작가 동지회 사무실, 그곳에서 전화도 받고 심부름도 하고 또 시간이 나는 대로 노래도 배웠다. 그러던 어느날 기순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말없이 뒷바라지해주는 작가와 작곡가들에게 소양강 매운탕이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어 초대를 한다.

이때 초대된 이들이 반의월, 김종환, 월견초,고명기등, 그들이 소양강 한가운데서 천렵(물고기 낚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 갑자기 바람이 심하게 불고 소나기가 퍼붓는 순간이었다. 돛단배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찰라 맏딸 기순은 반야월 앞에 정신없이 엎어진다. 이 광경을 직접 체험한 반야월은 돌아온 즉시 다음과 같은 가사를 적어서 작곡가 이호에게 좋은곡을 부탁했고 그 다음날 당시 열여덟살이던 김태희(본명 김영옥)의 목소리로 세상에 띄운다.

 

해저믄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처녀

(소양강처녀1)

 

그런데 1951년생인 김태희는 박시춘의 먼친척이었다. 그녀는 1970년 가수로 대뷔했으며 이소양강처녀는 사실 그녀가 데뷔 2년전에 (1968년도) 취입한것이다. 이 신출내기의 음반이 자그마치 10만장이나 팔렸고 김태희는 그해 신인 가수상을 받았다. 그 후에 가수 한서경이 리메이크 했는데 대중의 인기를 받은 것은 부산에서 시작한 노래방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부터였다. 오늘날과 같은 노래방”1호는 1991년 사업자 등록을 한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 있는 하와이안 비치 노래방이고 그 뒤 1년만에 전국 방방곡곡에 무려 12,000여개의 노래방이 오픈을 했다.

무엇보다 20년 넘게 아줌마로 지내던 김태희는 가수 인생을 다시 시작했다. 어쩌면 소양강 처녀가 소양강 아줌마가 돼서 돌아온 것, 특히 2절 가사 중 동백꽃 피고 지는의 동백꽃은 남녁에 서식하는 빨간 동백꽃이 아니라 노란꽃이 피는 생강나무꽃이다 일명 산동백이라고도 하며 춘천 출신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도 바로 이 꽃임을 명기 해둔다.

한편 2004년 춘천시는 소양2교 인근에 노래비를 제막했는데 본래 이 노랫말의 주인공 유기순은 2006년 춘천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나이 55, 열여덟 딸기같은 어린 순정을 품고 서울등 객지를 떠돈지 36년만이다. 그녀는 노랫말처럼 슬피우는 두견새가 되어 밤무대를 누비던 타향살이를 끝내고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 집 다리골에 평상 20여개를 편 촌닭 백숙전문 풍전가든을 운영하는데 영업이 그런대로 잘되는 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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