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 법성포초등학교 1956년 졸업

해 마다 이즈음, '법성포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이 학교 동문들과 경향각지의 향우들이 어울려 체육대회, 또는 운동회라는 이름으로 큰 잔치를 벌인다. 올해로 28() 맞이하는 이 행사는 주관기수 59(회장 서재창) 졸업생들이 준비에 비지땀을 쏟고 있다.

 

군청을 법성포로 옮겨 ....

널리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 법성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조창이 자리하였고, 영광군수보다 품계가 높은 종3품 첨사가 고을 수령이었던 고장이다. , 1789(정조 13)부터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1895(고종 32)까지 무려 106년 동안 영광군에서 분계되어, 한때는 종2품 방어사진으로 승격시키고자 했던, 영광군수 관할 밖의 독자 행정 권역이었다. 그래서 고을 수령이 영광군수와 똑같이 3(軍政, 田政, 還政)을 행사했던 요충지였다.

, 대한제국시대인 1899년에는 낙월, 송이, 안마, 위도 등 칠산해역의 섬들을 한데 모아 신설된 지도군 청사를, 신안군청을 목포에 두었듯이 법성포에 지도군청을 두려고 했었던 고장이다.

이와 같은 여건 때문에 이 고장은 서구문화가 아주 이른 시기에 유입되었고, 1906년에 '법성사립보통학교'가 개교되어 영광군내에서 가장 빨리 소위 '신식학교'라 했던 보통학교가 자리했었다. 이 학교 1회생 가운데 고경진(1887년생)은 기미 '3.1운동' 때 영광의 위계후와 함께 만세시위에 앞장섰던 항일의 태두였고, 2회 졸업생으로 이 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신흥학교에 진학하여 전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하여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고형진(1896년생), 바로 고경진의 친동생이다.

 

법성포초등학교의 시원(始源)

법성향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신명희(1901년생)(사립 법성중·고교 초대 교장 역임)의 유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7살 때니까 1907년이다. 어느 날 밤에 학교에 갔더니 서쪽 방에서 고경진, 나계형, 이경섭, 조덕연, 나상희 등, 여러 사람이 모여 무어라 소곤거리더니 나중에는 고경진씨가 책상을 치며 통곡을 했다. 나는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슨 사유인지 알지 못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에 우연히 고경진씨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도지사의 학교방문을 앞두고 교문에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가위 모양으로 교차 게양 되어 있었다. 이것을 본, 고경진씨는 얼굴이 상기되어 한동안 말을 못하더니 일본 국기를 떼어내 찢으려다 안 찢어지자 일본 국기를 발로 딛고 찢어 내던져 버렸다. 이 광경을 본 일본 사람들은 아연실색하였고, 교문 앞에서는 학생들과 일본 사람들이 뒤엉켜 집단 난투극을 벌렸다.. " (법포견문기에서)

, 신명희는 1970년대에 법성향지를 집필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했던 김일록(1927년생)에게 다음과 같이 보통학교 개교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나는 열일곱 살 때 까지 한문만 읽었네. 한문으로는 만만치 않게 읽었네. 그래서 맹자 같은 거 대학 같은 건 선생 없이 나 혼자

그때는 맹자, 대학 같은 거 줄줄이 앞줄까지 다 외우던 판이었어. 그런디 이렇게까지 세상에 잊어버릴까 몰라

그러다가 신식공부를 하고 싶은데 우리 아버지가 학교에 보내주지 않으니 댕길 수가 없었어... 그때는 머리 깎으면 다 초상난 집 같이 울었네. ... 학비도 안 받고, 공책, 연필도 공짜로 주고, 총각, 유부남 가리지 않고 입학할 수 있었어도, 상투 자르고 머리 깎으면 일본 놈 된다고 학교에 보내지 않았어... 그런대도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나서 쫓아가 보먼 우리아들이 머리 깎았네 그러면 동네 아이들도 따라서 울었네. ...

나는 12살부터 보천교에 미쳐 가지고 밤낮 그거만 허면서 공부를 못 했지. 성 가셔서 아버지가 그것 않는다고 항깨 머리 깎아 . 그걸 않는 표식이 머리 깎는 거 였어 ... 그때 나는 한문은 꽤 하는디 일본어는 하나도 모르고, 아라비아 숫자 하나 모르니까 환장할 노릇 아닌가? 그래서 고경진씨를 찾아 갔네 그리고 개인 교습을 받았지. 한 사나흘 동안 아라비안 수칙, 처음으로 산학(수학) 공부하러 갔단 말이야 (法鏡軒 소장 녹음 자료에서)

'법성사립보통학교'가 개교되던 시기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과 을사늑약, 항일의병운동 등의 영향으로 반일감정이 극에 달했던 시기라, 신명희의 회고에서 보듯이 보통학교를 다니면 일본 놈이 된다는 의식과 두발문제로 아이들은 소위 '신식공부'를 하고 싶어도 학교에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하면서 부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깎고 입학하는 학생들이 늘어갔고, 이로 인해 학교는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일본 국기를 발로 디뎌 찢어 버린 사건(日章旗踏裂事件)'으로 고경진은 평양 '대성학원'으로 강제유학을 하여야했고, 학교는 일경(日警)의 감시에 시달려야했으며, 무상교육에 따른 학교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은 학부모들과 포 내 뜻있는 인사, 119명으로 부터 467원을 모금하여 재정난을 잠시 동안 해소하였지만 이마저 일제가 '기부금모집취제규칙'을 제정하여 미 인가 사립학교의 기부금 모집을 금지하고 '보통학교령'을 공포하여 사립학교 정비에 들어가자 학교는 폐교 위기에 직면하기에 이른다. 이에 남궁시삼(보명 南宮治)(1850년생)이 앞장서 1908년에 영광 갑부 조희경이 소유한 조선시대 세곡검사소 였던 '동조정'을 무상으로 임대하고, 학교운영비를 전담하여 포 내 유지들과 함께 4년제 '사립 법성포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가 지금의 '법성포초등학교'.

일제강점기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13월 말 현재, 전라남도내 15개 보통학교 가운데 '법성포초등학교' 전신인 '사립 법성포보통학교'의 학생 수가 122명으로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지금의 '영광초등학교' 전신인 '영광보통학교'로 학생수가 112명이었다.

선배들은 피 터지며 항거하였는데,

졸업횟수는 일제유습을 이어오고 있는 이상한 학교

1919년에 이르러 조선총독부는 '318개년 계획'에 따라 3개면에 공립보통학교 1개소를 개교하여 무인가 사립학교를 정비하였다. 이에 따라 법성면의 2개 사립 보통학교 가운데 무인가인 '법성사립보통학교'4년제로 인가된 '사립 법성포보통학교' 모두를 폐교 조치하고, '보통학교령'에 따라 인가된 '사립 법성포보통학교'19207월에 공립학교로 신설 신청하였고, 831일 인가되어, 913일 사립에서 공립으로 무늬만 바꿨으며, 사립학교 재학생들을 그대로 수용하고 신설학교로 모양을 갖춰 개교하였다.

그리고 사립학교 11회 졸업생들의 졸업연도인 1921년에 공립학교 제1회 졸업식을 하였다. 지금 '법성포초등학교' 출신들의 졸업기수는 모두 공립 1회인 1921년이 기준 년으로, 1920년 이전의 학교사와 단절하고 일제의 의도대로, 우리 선현들과 맥을 끊고, 일제의 뿌리인 1921년을 시원으로, 햇수를 거듭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 학교 출신들이 얼마나 피 터지며 일제에 항거하였는지 '3.1운동'을 기점으로 되돌아보자!

1919년 법성포의 '3.1운동'은 고경진, 신명희 등을 중심으로 당시에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최복섭(당시 나이 17), 퇴학생 박명서(" 18), 2학년 재학생 유영태(" 18)와 기소 유예된 3학년 재학생 양원상(" 16) 7명이 옥살이를 하였고, 고초를 겪었다.

'3.1운동'이 발발하고 10년 후에 일어난, 1929'광주학생운동', 이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거나 퇴학을 당한 영광군 출신 5명 가운데 세 사람이 '법성포초등학교' 출신이다.

1908년 개교 당시 4년제였던 '법성포초등학교'는 학부모들의 학년년장운동에 힘입어 1926년에 6년제로 학년이 6연장되어 이 학교 출신들의 상급학교 진학길이 열렸다. 이에 따라 1928년에 6년학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이 가운데 신명철(1910년생)(광복 후 법성 초대 면장, 신명희 친동생)과 박기순(1911년생)(졸업 당시 수석)'광주사범학교', 남궁조(1911년생)(법성포의 덕망가 남궁수삼의 큰아들)'목포상업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모두 수재들이 모인다는 학교다. 이들이 모두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여 신명철은 주모자로 징역 2, 박기순은 금고 8, 남궁조는 면소되어 모두 퇴학당했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고 8년 후인 1937, 일제경찰은 군내 230대 청년들, 300여명을 소위 '불령선인'으로 낙인찍어 이 가운데 131명을 구속하였다. 그리고 9개월 여 동안 악명 높은 전남도 고등계 노주봉 형사가 악랄한 고문과 겁박을 자행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날조 34개월 여 만인 1940년에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에서 1심 재판이 열렸고, 그 결과 법성의 김대중(당시 나이 26)(이명 김철현, 속칭 35회 김종섭, 53회 김춘희 아버지), 홍종식( " 25)(속칭 36회 홍윤표, 40회 홍순표 전 조대병원장 큰아버지), 나원각(羅圓覺)(" 24)(속칭 36회 나청행 아버지), 영광의 조주현(曺柱鉉)(필명 : 조운)(" 39)에게 징역 10월형이, 남궁현(38)(속칭 29회 남궁성의 아버지)에게 육군형법과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금고 8월 형을 언도하여, 이들은 모두 형기초과로 당일 석방되었다.

조운을 제외한 모두가 '법성포초등학교' 출신이다. 영광군지법성향지에는 이 사건으로 조운, 위계후, 남궁현, 나질순이 실형을 받고 복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기록이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에 이 학교 출신들은 10년 주기로 처절하게 일본에 항거하였는데, 선배들의 희생을 외면한 채 금년에도 일제의 유습대로 제96회 졸업식을 마쳤다. 졸업횟수로 기산하면 '법성포초등학교''개교 109'이 아닌 '개교 96'이 맞는 표현이다.

법성동교 제33회 동기동창콩클대회 기념사진

4292. 1.14 악사 무용부 법성무지게사진관/법성동교 : '법성포 동국민학교' 약자로 지금의 '법성포초등학교'./무지게사진관 : 속칭 43회 이재철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사진관으로 법성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했던 사진관이었다.

 

졸업횟수를 바로 잡고자 했던 선배들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1959년에 '콩클대회'를 주최한 속칭 23회 졸업생들은 '법성동교 제33회 동기동창 콩클대회기념'이라고, 23회가 아닌 33회로 졸업했다고 표기하고 있다. 일제기원의 졸업횟수가 아닌 사립시원의 졸업횟수를 표기하고 있다. 또 이 기수인 김영남도 법성향지"일본사람들이 하던 대로 답습하고 있는 졸업횟수의 시정을 촉구하고, 아주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 2008년에 총동문회에서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출간한 개교 100년사에서도 구체적으로 지적되어 있다. 그러함에도 오랜 세월 관습이란 핑계(?), 졸업횟수가 시정되지 않고 있다.

개교 109년이라는 학교의 졸업횟수가 96회라니 이상한 학교 아닌가? 2018, 내년에는 이 학교가 개교한지 110년이 되는 해다. 영광군에서 유일하게 5개 부처 장관을 배출했고, 문재인 정부의 국무총리 학적이 이 학교에 있지 않는가?

이번 동문회를 계기로 학교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110주년이 되는 내년 2월 졸업식은 제107회 졸업식이 되도록 동문회에서 책임지고 교육 당국과 협의하여 반드시 시정하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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