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9)-자연사(혜원과 도생)

우리는 흔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 중얼거리며 염불(念佛-부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불경을 외는 일)하는 스님들을 흔히 만나 볼 수 있다. 바로 이 염불을 창시한 사람이 혜원이다. 혜원(333-416)은 중국 동진(東晋) 때의 승려로서, 화북 지역에서 도안에게서 배운 다음 강남으로 내려와 구마라습 등의 교학적 흐름을 이어받았다. 그는 과연 사문(출가하여 수행하는 모든 사람)이 왕에게 경배를 해야 하느냐?’의 문제, 혹은 우리의 육신이 죽은 후, 영혼이 불멸하느냐?’ 의 문제와 씨름하며 대결해나갔다. 또한 불교 경전의 번역을 중하게 여겨 구마라습 등에도 그 사업을 권고하였고, 그 스스로도 <아비담심론>, <대지도론> 등에 서문을 지어 붙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여든 세 살이 되던 해 8월 초,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병의 증상은 매우 위태롭고 중했다. 제자들과 수많은 인사들이 그의 옆에 둘러앉았다. 의사가 고주(鼓酒-술을 거르거나 짜는 틀)로 만든 탕약을 그에게 마시도록 하자, 그는 냄새를 맡고는 입을 떼었다. “주기(酒氣-술기운)가 있구나. 술이로군....그렇다면 난 마실 수 없네.” 이에 그의 제자들은 무릎을 꿇고 간절히 말했다. “선생님, 이것은 술이 아니라 약입니다. 한 사발만 드시지요.” 그러나 혜원은 고개를 저으며 신음하듯 대답하였다. “술은........오계(五戒-불교 신자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금지사항. 중생을 죽이지 말 것, 훔치지 말 것, 음행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술 마시지 말 것 등) 가운데 하나인데, 어찌 내가 거스를 수 있겠는가?” 의사는 딱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렇게 권하였다. “그럼 미음(입쌀이나 좁쌀에 물을 넉넉하게 붓고 푹 끓여 체에 밭아낸 걸쭉한 음식)으로 고주를 대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혜원은 여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에 의사는 재차 다그쳤다. “그렇다면 밀즙(蜜汁-꿀벌이 분비하며 벌집의 주성분이 되는 물질. 꿀밀, 밀랍)에 물을 타면 어떨까요?” 주위의 사람들도 간곡히 권하였다. 그는 한참 신음하던 끝에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 자네들은 계율을 찾아보고, 마실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게나.”

그러나 제자들이 계율을 절반도 찾아보기 전에 혜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세속과 단절하기 위해 37년 동안 여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혜원, 그가 마지막 장면에서도 지나치리만치 의연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혜원의 제자인 도생(372-434. 동진의 승려)은 사람마다 본래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천제(闡提-부처가 될 여지가 전혀 없는 사람) 또한 사람이기에 불성(佛性)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마땅히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고, 이로 인하여 많은 승려들로부터 배척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이 있은 지 3년 후, 인도로부터 전해져온 대열반경에는 천제지인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혀져 있었다. 이때부터 그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예순 살의 그가 여산의 동림사에서 불법을 강의할 때는 온 산이 사람들로 뒤덮였다.

그로부터 다시 2년이 지난 어느 겨울, 여전히 그는 여산의 동림사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열반경(涅槃經)-석존의 입멸에 관하여 설명한 경전)의 강해가 막 끝나갈 무렵, 그의 손안에 들려 있던 사슴 꼬리가 땅에 떨어졌다. 모두들 깜짝 놀라 달려갔을 때는 당대의 고승이 이미 세상을 떠나 있었다. 그의 죽음은 온 도시를 진동시켰다. 그가 죽자 일반 명사와 고승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전에 그를 몰아냈던 혜의 등도 와서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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