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 사진가

다시 연말이다. 시간은 나이만큼 간다더니 자고 나면 토요일이고 못한 일 정리하다보면 벌써 12월이다. 펼쳐진 시간을 12장 달력으로 나눠 놓은 것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생각은 전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얽매인다. 게으름으로 밀쳐놓은 일들이 시간의 조급함을 일깨우나 보다. 정리 없는 시작은 뭔가 불안하다.

연말 모임은 망년회 혹은 송년회라 칭한다. 1년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어떤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각 모임에서는 연말 모임에 따로 의미를 부여한다. 현대인들의 사회성향은 모임에서 나오고 필수적 사회 참여의 방법이 되었다. 보통 5~10여 개의 모임을 한다고 보면 연말은 음주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사회활동을 위해선 쓰린 속을 달래며 어쩔 수 없이(?)’ 모임에 나가야 한다. 요즘은 음주문화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술을 배척하는 모임은 거의 없다. 근래에 망년회의 망자를 바랄 자로 살짝 바꿨지만 원래는 잊을 자였다. 알코올이 인체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마비시키는 곳이 이성을 관장하는 뇌이니 맞는 말이다.

가는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자는 의미의 자리는 필요하다. 하지만 망년 혹은 송년의 문화가 조금은 바뀌어도 좋을 듯하다. 선진국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지만 가족과 함께 조용히 보내는 그들의 송년문화는 분명 좋아 보인다. 각기 생각은 다르겠지만 한 해를 보내며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자. 지난 1년의 시간도 자신의 것이다. 잊으려는 노력보다는 남은 시간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맞다. 좋은 친구들을 만나 술 한 잔 하는 것이야 아무 때나 하고 연말에는 가까운 곳으로 훌쩍 주말여행이라도 떠나보자. 혼자라도 좋고 가족과 함께여도 좋다. 술자리에선 자신을 찾을 수 없다.

오래 전부터 술은 음식이었다. 그만큼 오래된 인류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건강을 해하는 가장 큰 주범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만 법적인 규제는 없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술 담배이고, 끊으라는 것도 술 담배다. 이렇게 술은 건강을 담보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나눠주고 있다. 이른바 적과 친구의 양면성이다. 술에는 교양이 없지만 주도는 있다. 우리가 서예라 부르는 것도 중국은 서법(書法)으로 일본은 서도(書道)라 부르고, 차례혹은 다례(茶禮)는 다도(茶道)라 부르며 를 붙이는 것이 일본의 습성이고 보면 주도(酒道) 역시 비슷하리라는 생각이다. 주도유단(酒道有段)이라는 말이 있다. 주도에도 단계가 있다는 뜻이다. 시인 조동탁(지훈)은 주도를 9급에서 9단까지 나누었다. 자신은 어디에 해당하는지 판단해 보자.

9급은 불주(不酒)로 못 마시는 것이 아니라 안 마시는 사람, 8급은 외주(畏酒)로 마시긴 하지만 술을 겁내는 사람, 7급은 민주(憫酒)로 취하는 것이 민망스러운 사람, 6급은 은주(隱酒)로 모두 가능하지만 돈이 아까워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5급은 상주(商酒)로 이익이 있을 때만 술을 사는 사람, 4급은 색주(色酒)로 원활한 성생활을 위해 마시는 사람, 3급은 수주(睡酒)로 수면을 위해 마시는 사람, 2급은 가장 보편적인 반주(飯酒)로 밥맛을 위해 마시는 사람, 1급은 학주(學酒)로 술의 진경을 배우는 주졸(酒卒)을 이른다.

이어서 1단은 애주(愛酒)로 술을 사랑해 항상 술을 좇는 주종(酒從), 2단 기주(嗜酒)는 술맛에 반한 사람으로 주객(酒客), 3단 탐주(耽酒)는 술의 진경을 터득한 사람으로 주호(酒豪), 4단 폭주(暴酒)는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으로 주광(酒狂)이라고 한다. 5단은 장주(長酒)로 주도 삼매에 든 사람이라는 주선(酒仙), 6단 석주(惜酒)는 술과 인정을 아끼는 사람으로 주현(酒賢), 7단 낙주(樂酒)는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의 경지로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인 주성(酒聖), 8단은 관주(關酒)로 술을 보니 즐겁지만 마실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주종(酒宗), 마지막 9단은 폐주(廢酒)로 술로 인해 다른 세상으로 떠난 사람이라는 열반주(涅槃酒). 한 해의 마무리를 적어도 술자리에서 하지는 말자.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