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11)-자연사(원효와 서경덕)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원효(617-686)사람은 왜 죽는 걸까?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하는 철학적인 사색에 빠져들었고, 이때부터 생로병사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화랑이 되어 학문과 궁술, 검술, 기마술 그리고 풍류까지 죄다 익혔지만, 백제와의 전투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불교에 귀의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무덤에서 해골의 물을 들이마신 일로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원효는 엄한 계율에서 벗어나 문란한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파계승이라고 하는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법회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여곡절 끝에 원효는 태종 무열왕(신라의 제29대 왕. =김춘추)과부 된 둘째딸 요석 공주와 동침을 하게 되고, 둘 사이에서는 설총(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히는 유교의 거장)이 태어난다.

오직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하는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한없는 질시의 눈초리를 보낸다. 하지만 그에게도 기회는 찾아왔다. 임금이 당나라로부터 구해온 불경 <금강 삼매경>을 제대로 해석할 승려가 없었고, 이때 대안법사가 그를 추천한 것이다. 그의 강해가 시작되자 경내에는 감탄사가 품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원효대사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시다!”라는 찬사가 울려 퍼졌다. 이때로부터 원효는 더욱 더 연구에 몰두하였던 바, 그의 연구가 미치지 않는 불경은 하나도 없었다. 만년에는 경주의 고선사에 머무르다가, 686330일에 산중 깊숙이 자리 잡은 경천 남산의 작은 절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예순 아홉이었다. 그가 죽은 뒤, 아들인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塑像-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신라 애장왕 때에 그의 후손인 설중업이 당시 실권자였던 김언승(뒷날의 헌덕왕)의 후원으로 고선사에 비를 세웠다.

어렸을 적부터 공부에 열중한 화담 서경덕(1489-1546)은 열여섯 살 때 <대학>을 읽어 그 뜻을 깨우치고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철철 흘리기까지 하였다. 그가 사색에 잠길 때에는 밥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길을 걸어도 어디를 갈지 몰랐다고 한다. 측간에 가서도 무엇을 골몰히 생각하느라 대변보려던 생각을 잊고 그냥 일어나 나오기도 했다. 며칠씩 잠을 자지 않는가 하면, 조금 눈을 붙여 꿈속에서 풀지 못한 이치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지나친 독서와 사색 탓으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기 위해 스물한 살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전국 곳곳의 명산 등지를 찾아다녀야 했다. 그 때문에 그의 나이 마흔에 이미 60세 이상의 노쇠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고 한다.

사서삼경과 시 짓기, 글쓰기, 음률에까지 모두 뛰어난 데다 특히 용모가 빼어났던 명기(名妓) 황진이가 당대의 대학자인 그(화담 서경덕)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한 스토리는 너무나 유명하다. 강렬한 육체적 유혹을 벗어난 그에게 개성 사람들은 황진이와 박연폭포를 함께 묶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렀던 것이니.

서경덕은 2년 가까이 병상에 누워 있다가 죽기 직전 시자(侍者-시중드는 사람)에게 업혀 화담(花潭-지금의 개성에 위치. 서경덕의 호가 됨)으로 갔다. 그곳에서 목욕하고 돌아와 세상을 떠나니, 때는 154677일 그의 나이 쉰일곱이었다. 임종할 때 한 제자가 선생님!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화담은 죽고 사는 이치를 이미 알고 있은 지 오래다. 마음이 편안할 뿐이다.”고 대답하였다. 1578년 선조는 그를 우의정에 추증하고,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