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17)-사형(혜강)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혜강(嵆康, 223-262)은 천부적 재능과 뛰어난 용모의 소유자였다. 그는 일찍이 천자(天子)를 시중하는 명예직 중의 하나인 중산대부(中散大夫-5품 이상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사임하고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교제하는가 하면, 종종 산으로 올라가서 약초를 캐고 단약(丹藥-신선이 만든다고 하는 장생불사의 영약)을 먹으며 수명을 늘리는 일에 힘썼다. 문학과 회화(그림)에 뛰어났던 그는 특히 거문고를 좋아하였다.

청년시절의 어느 날 밤. 혜강은 한 정자 위에서 거문고를 타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윽고 밤이 샐 무렵, 거문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한 노인을 발견하였다. 그는 노인에게 한 곡조 타 주십사고 간청을 하였다.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거문고에서는 슬픈 곡조가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듯 하다가 이내 즐거운 멜로디로 바뀌는가 하면, 곧이어 흐느끼는 여인의 소리로 변하곤 하였다. 소리가 딱 멈춘 뒤에야 정신이 든 혜강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비법을 제발 가르쳐 주십사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에 노인은 그 곡에 얽힌 고사를 들려주었다.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도모할 때, 맨 먼저 공격대상으로 삼은 곳은 한나라였다. 그런데 한나라의 대신(大臣) 협루는 진나라와 내통하여 조국인 한나라를 팔아넘기려 하였다. 이에 반대하다가 제나라로 망명한 대신 엄중자는 섭정(攝政)을 만났다. 섭정은 본래 백정(白丁)이었으나 의협심이 매우 강한 대장부였다. 엄중자의 간청을 받아들인 섭정은 한나라로 건너가 협루를 찔러 죽였다. 임무를 마친 섭정은 자기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눈꺼풀과 코, 귀를 자르고 얼굴을 으깬 다음,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말았다. 한나라에서는 그의 시체를 큰길가 높은 곳에 걸어놓고 현상금을 내걸어 그의 신원(身元)을 밝히려고 하였다. 이때 섭정의 누이 섭보는 한나라의 간신이 척살(刺殺)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없앤 자객은 분명히 내 동생이었을 것이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다시 그 자객에 대한 소문을 듣자 동생은 내가 사건에 연루될까봐 그랬구나!”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동생의 시체 곁에 다가가 슬피 울어 애도의 뜻을 표하고, 동생의 이름을 주변의 관중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형리에게 체포되기 직전, 동생의 시체 곁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혜강은 그만 감격하여 할 말을 잊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보니, 노인의 자취는 온데 간 데 없었다. 혜강은 이 무렵 실권자로 등장한 사마씨 정권에 굴복하지 않은 채, 시를 짓거나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런데 평소 혜강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던 종회(鍾會)가 사마소에게 혜강을 꼬여 바쳤다. 혜강이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산도(山濤)에게 답한 편지 가운데 사마소를 비방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형장에 끌려간 혜강은 거문고로 <광릉산> 한 곡조를 타며, 간신 섭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간신들을 제거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의 술책에 걸려들고 만 자신의 무력함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승과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거문고의 비장한 멜로디가 울려 퍼지자 형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혜강은 마침내 거문고를 손에서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내가 죽는 것은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그러나 <광릉산>! 너는 이후부터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그것이 원통할 뿐이로다!”

이렇게 해서 혜강이 죽으니, 그의 나이 겨우 서른아홉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광릉산>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다만 혜강처럼 온 생애의 정열을 모아 그 곡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그것이 아쉬울 뿐이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