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19)-사형(최제우, 전봉준)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 교수/ 철학박사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1824-1864)는 경북 경주군 견곡면 가정리에서 몰락한 향촌양반 가정의 서자로 태어났다. 열심히 공부를 하였지만, 반상(班常-양반과 상사람)의 등급과 적서(嫡庶-적자와 서자)차별이 심하던 당시의 풍조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공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상제(上帝-하느님)의 음성이었다. 그 후 최제우는 동학 창도에 나섰다. 그러나 관에서는 동학의 이론이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고 여겨 186312, 최제우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정보를 입수한 제자들이 피신을 권유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최제우는 스물다섯 명의 제자들과 함께 과천까지 끌려갔다가 마침 철종이 승하한 탓에 대구 감영으로 돌아왔다. 국상(國喪)이 날 적에는 서울에서 옥사(獄事-크고 중대한 범죄를 다스리는 일)를 벌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구 감영에서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때 제자들이 몰려와 구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 가운데에는 최시형(동학의 2대 교주)도 끼여 있었다. 그러나 최제우는 최시형에게 가급적 빨리 멀리 도망치라!”고 지시했다. 이에 최시형은 동학의 포교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대구를 벗어났다. 그러나 최제우는 좌도난정(左道亂正-정통의 교리가 아닌 것으로 백성을 혹세무민하여 정치가 어지럽게 됨)의 죄목으로 달성공원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그가 득도(得道)하여 동학을 포교한지 3년 만이고,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최제우가 죽은 후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갔고, 최시형은 잠행을 이어갔다. 그 후 최시형은 동학의 2대 교주로 취임하여 교리를 체계화하고 교세 확장에 몰두하는 한편, 교인들과 함께 교조(최제우)의 신원(伸寃-원통한 것을 풀어줌)을 정부에 호소하였다. 그때마다 조정에서는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속했으나 끝내 실천되지는 않았다. 그 후 천도교(3대 교조인 손병희가 동학을 개칭한 종교)는 일제의 탄압이 겹쳐 점점 쇠퇴하고 말았다.

전봉준(1855~1895)이 동학에 입도했을 무렵, 저 악명 높은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해 와서 온갖 노략질을 일삼기 시작했다. 이에 백성들은 억울한 사정을 글로 써서 군수에게 올렸는데,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그 대표자였다. 결국 전창혁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감옥에서 매를 맞아 죽고 말았다. 농민군의 세력이 커져 혼란이 일자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들에게 회유책을 써서 화해를 제안하였다. 이런 판국에 청나라의 군대가 출병하고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에 이르자 최시형은 무력봉기를 선언하였고, 이에 맞추어 전봉준은 전라도 일대에 동원령을 내렸다. 논산에서는 손병희를 설득하여 함께 공주를 압박해 들어갔지만,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에 밀려 다시 내려오고 말았다.

18941127일경에는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주력 부대는 완전히 해산되고 말았다. 전봉준은 상경하여 일단 동정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이에 장사꾼의 차림으로 서울로 올라왔다가 순창 피로리에 사는 옛 동지 김경천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집주인의 밀고로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가 음력으로 129일이었으니, 천운이 다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나주에 있는 일본군대에 머물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 영사의 회유를 뿌리치고 서문의 형장으로 끌려갔다. 일본인들은 민중세력의 중심인물인 그를 끌어들여 한국 침략의 하수인으로 이용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던 것이다. 마침내 1895423, 전봉준과 그 동지들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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