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 향리학회 회원

이즈음 법성포에서는 구수산 등허리로 휘몰아치며 무리지어, 스멀스멀 소리 없이 밀려드는 안개 무리를 자주 볼 수 있다. 예전에 이 풍광은 조기떼가 몰려온다는 신호였었다. 60여 년 전 만하여도 조기가 포구로 들어올 때면 자욱한 안개 속에 동남풍이 불고 뇌성이 요란했었다. 회유하며 물러 날 때도 역시 동북풍이 불고 뇌성을 알리면서 물러갔었다. 우리조상들은 이러한 자연현상을 조기와 연관하여 신성시했다. 그래서 조기를 '천어(天魚)'라고 까지 하였고, 고사리가 나올 때면 "조기 신산"이라 하여 조상 앞에 차린 다음에야 먹었다.

조기는 떼를 지어 바다 밑에 붙어 다니며 개구리처럼 울다가 물위로 뛰어오르고 회유하는 습성이 있다. 어군탐지기가 없었던 옛날에는 대나무 통을 바다 깊숙이 넣어 귀에 대고 조기우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그 우는 소리가 수림지대를 통과하는 강한 바람소리 같았다. 어망 속에서도 숫 놈은 자기 위치를 암놈에게 알리려고 우는 부부애(?)까지 지닌 이 조기는 잡히는 시기와 크고 작음에 따라 각각 그 명칭을 달리한다. 한식절인 양력 456일에 잡은 조기를 '한식사리 조기'라 하였고, 곡우절인 양력 42021일에 잡은 조기를 '곡우사리'. '곡우살조기', '곡우사리조기'라 특정하여 으뜸으로 쳤다. , 입하절인 양력 56~7일에 잡은 조기를 '입하 사리 조기'라 하였다. '굴비'도 크고 씨알 좋은 조기만을 골라 엮어 말린 것을 '장대', 작은 것을 엮어 말린 조기를 '역거리'라 불렀다. 이 호칭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굴비'의 단위는 보통 열 마리를 짚으로 엮어 '한 갓'이라 하였고, '두 갓'을 합하여 '한 두름'이라 하였다. 이에 반해 알배기 굵고 큰 '곡우사리'는 다섯 마리 씩 엮어 '한 갓'이라 하였고, '두 갓''한 두름'이라 하였다.

조선의 명산(名産), 전라도 '명태'라 했던 '영광 굴비'의 본산지가 법성포다. 오랜 세월 이 '굴비'가 왜 이렇게 유명했을까?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아 인천에서 '굴비'로 가공하면 법성포 '굴비'와는 판이하게 쓴 맛이 났고, 법성포 조기를 가지고 다른 지역, 예를 들면 인근의 군산이나 목포 등지에서 법성포와 똑 같은 방법으로 가공해도 법성포 '굴비' 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법성포 '굴비'가 유명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주로 해풍(海風)과 소금(염장)부분을 설명하며 맛의 뛰어났음을 이야기하는 분이 많다. 물론 이 부분도 빠트릴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법성포 앞, 칠산 어장에 지하수가 용출하고 있어 이 물을 먹고 자란 조기를 '굴비'로 가공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법성포 앞 칠산어장에는 아흔 아홉 골이 있는데 바다 속, 이 골짜기에서 용출되는 지하수가 칠산어장의 염도를 중화시켜 조기들이 산란하기 좋은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법성포 앞 칠메 삼봉(三峯)에서 산란하고 연평도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래서 "곡우절기에 이곳에서 잡은 알배기 조기를 최상품으로 쳤고, 이 조기로 법성포에서 가공하여 '영광굴비'라는 브랜드로 사대부들의 관혼상제에 빠짐없이 진설되었다."고 한다. , 가공 처인 "법성포와 조기 어장인 칠산 바다가 지척이기 때문에 운반거리가 짧아 선도가 유지된 조기에 발막리에서 만든 소금(화염)을 간하여 이곳 특유의 해풍에 말려 법성포 '굴비' 고유의 뛰어난 맛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지하수에 대한 기록은 '쑥구지''차독배기' 샘물, 그리고 백수 해안도로 변의 열부 순열지 앞 해변에서 용출하는 지하수로 미루어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열부순열지 앞 약수는 썰물 때만 이용할 수 있었고, 들 물일 때는 바다에 잠기는데 피부병에 특효라 하여 법성포 사람들이 약수로 이용했었다. 지금도 이 약수가 용출된다면 '낙조', '조기', '굴비', '정유재란' 등을 소재로 관광자원 화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일이다. 420여 년 전. 정유재란 당시, 참상은 월봉 정희득 공의 피수일기인 해상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조기는 암컷이 수컷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수컷 한마리가 8,000여 암컷을 거느릴 정도라니 대단한 정력(?)을 지니고 있는 고기다. 법성포 조기는 이곳에서 만 지니고 있는 독특한 맛과 우리 몸에 이로운 풍부한 영양을 고루 함유하고 있어 상류가정이나 환자의 영양식으로도 많이 쓰였고, 조기젓은 가을 김장의 필수품이기도 하였다. 더불어 치료제로도 이용했었다. 조선 숙종 때 상주목사를 지낸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에는 동의보감을 인용하여 "조기를 구워 먹이거나 달여서 즙을 내어 먹이면 풀독이 치료된다."고 하였고, 조선 정조 때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이의봉이 쓴 고금석림에는 수양총서유집을 인용하여 "조기는 위의 활동을 도와 식욕을 돋게 하고, 원기회복에 좋으며, '굴비'는 소화가 되지 않고 위에 남아 있는 음식물의 소화에 좋을 뿐만 아니라 머리에 막혀있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돌을 갈아 먹으면 성병(임질)을 치료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00여 년 전에 출간된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법성포에서는 다음과 같이 '굴비'를 가공하였었다. "조기에 소금을 뿌려 하루 정도 놔두었다가 짚으로 엮어 걸대에 걸고, 마른 갈대로 엮어 만든 보호막(섶장)으로 덮은 후, '굴비'가 떨어지는 일이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망을 친다. 높이 약 7.2m, 길이 약 11m 정도의 통나무를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고, 몇 개의 가로 목을 붙여 계단을 만든 걸대에 한 번 말리는 조기 량은 약 7만 마리 정도다. 건조기간은 판매지역에 따라 다르다. 판매처가 먼 곳은 20일 이상, 가까운 곳은 56일정도 말린다. 조기를 간하는 소금의 량은 사들여 보관하는 기간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염장굴비 천 마리 당 약 61가마 두 말 정도며, 마른 굴비는 보통 5말 정도다. 매년 봄철에 이곳에서 소비되는 소금은 약 1천 가마 정도다."

곡우사리 '굴비'를 커다란 보리 항아리에 묻어 두었다가 한 여름에 찢어서 고추장 찍어 찬물에 만 밥 위에 얹어 먹었던 옛 생각이 나, 훗날 전통 '굴비' 가공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두서없이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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