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죽음(20)-사형(브루노와 한비자)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육대 교수/ 철학박사

서기 1600217, 로마의 한 광장에 장작더미가 쌓이고 그 위에는 온몸이 꽁꽁 묶인 사람이 올려 놓인 채 불이 붙었다. 죽음을 눈앞에 바라보는 사나이의 입에서는 단 한 마디의 신음소리나 호소도 들려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십자가를 건네주었을 때, 그는 비웃는 표정으로 말없이 뿌리쳐버렸다. 이와 같이 최후를 마친 사람이 곧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 조르다노 브루너(1548-1600,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자연철학자)이다.

자연에 대한 열화 같은 사랑과 세계에 대한 뜨거운 애착, 당시의 과학적 발견 성과에 대한 깊은 지식에 자극을 받아 수도회를 떠났던 브루노는 어쩌면 시대가 낳은 비극을 몸소 겪은 철학자일지도 모른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사상 때문에 어떤 곳에서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없었으며, 이단적인 사상으로 가득 찬 그의 원고를 출판해줄 인쇄업자도 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이단적인 사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자연 속에 신이 두루 깃들어있다고 보는 신관)으로서 신이란 세계의 밖에 있는 초월적 위치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계 안에 세계 전체와 그 모든 부분에 대한 활력적인 원리로서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이것이 당시 교회와 큰 마찰을 빚었던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을 떠돌아다니던 브루노는 어느 날, 한 베니스 사람의 초청을 받아 로마로 간다. 이제 15년 이상의 실향민 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에 돌아갈 꿈에 부풀어있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으니, 즉 그를 초청했던 바로 그 사람이 그를 밀고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결국 그는 종교재판소로 이첩되었고, 베니스 사람들은 종교재판소가 요구한 대로 그를 순순히 로마당국에 인계하고야 말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끝내 자기의 철학을 완강하게 고집하던 그는 7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마침내 로마에서 화형(火刑)에 처해졌던 것이다.

한비자(중국 전국시대 말기 한나라 출신, 기원전 280?233)는 소년 시절에 이사(李斯, ?-기원전 210, 시황제를 섬겨 군현제, 분서갱유 등을 추진)와 함께 대유학자인 순자에게서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조국인 한나라는 진나라에게 많은 땅을 빼앗기고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진나라의 시황이 한비자를 만나보고 싶은 일념으로 한나라를 공격하였고, 이 배경을 알게 된 한나라 왕이 한비자를 진나라로 보냄으로써 화를 모면하였다. 이리하여 시황 앞에 나아간 한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글을 올려 조국인 한나라의 안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친구인 이사는 학생시절에 자신이 한비자 보다 못한 줄을 이미 알고 있던 데다, 그가 시황의 총애까지 받게 되자 심한 질투심을 느꼈다. 그래서 어느 날 시황 앞에 나가 참소하였다. 이에 시황은 이사의 간교한 말만 믿고 한비를 하옥시켰다. 그렇지만 그를 죽일 의향까지는 없었다. 이에 안달이 난 이사는 시황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몰래 하수인을 시켜 독약을 보내 자살하도록 명령하였다. 한비는 이사의 모함을 눈치 채고 여러 차례 시황에게 상소하였으나 끝내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결국 그의 억울한 죽음은 동문수학(同門受學)한 친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사 역시 조고(趙高)의 참소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나중에야 모든 것을 깨달은 진시황이 아직도 한비가 살아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어 그의 죄를 벗겨 주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한비의 몸이 백골(白骨)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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